[출처] [번역] 로코솝스키: 모스크바에서 우리가 이겼다는 느낌이 들었다|작성자 쿠악이
전쟁이 시작된 첫날부터 문화예술인들은 예술적 수단을 활용하여 전쟁의 역사를 적극적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모스크바 근교에서 소련군의 반격이 시작되자, 붉은 군대 정치국(ГлавПУ) 지도부는 소련 예술가 연합과 협력하여 모스크바를 수호한 소비에트 연방 영웅, 파르티잔과 군 사령관들의 흉상을 조각하도록 조각가들에게 지시했다.
가브릴로프는 이 아이디어에 큰 관심을 보였고, 주정치국 부국장 F. F. 쿠즈네초프로부터 제16군 사령관 K. K. 로코솝스키 중장의 흉상을 제작하는 임무를 받았다. (그리고 최전선 병사들과 지휘관들의 스케치를 그리라는 임무도) 1941년 12월 31일, 가브릴로프는 볼로콜람스크 방향으로 출발했다. 이 전선의 전투는 막 끝난 참이었고, 이스트라 근처는 아직 정리되지 않아 시신도, 차량도, 포도 그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여기서 가브릴로프라는 관찰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는 수많은 세부 사항을 관찰하고 기록했으며, 예술가로서 주변 현실을 면밀히 들여다보고 주변 사람들에게 진심 어린 관심을 보이며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전선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많은 질문을 쏟아냈다. 이 모든 건 영하 40도라는 혹독한 환경에서 이루어졌다.
가브릴로프가 제16군 사령부가 있는 아쿨로보 마을(현재 오딘초보 지역)까지 도착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그는 로코솝스키를 바로 만날 수 없었는데, 사령관이 계속 전선에 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1942년 1월 6일에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나는 그를 한 번도 본 적 없어서 완전히 다른 사람을 상상하고 있었다. 평균보다 큰 키에 멋진 체격을 가진, 약간 찌푸린 회청색 눈을 가진 남자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가 농담조로 물었다. "술 마십니까?" 나도 같은 어조로 대답했다. "마십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그럼 당신은 우리 사람이군요. 들어오시죠."
가브릴로프가 로코솝스키에게 자신이 온 이유를 설명하자 그는 반대하기 시작했다.
"글쎄요, 제 생각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죠?"
"뭔가 불편합니다. 이 이야기는 미뤄두죠. 제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흉상을 만듭니까? 제가 전사한다면 괜찮겠지만, 살아있는 사람의 기념비를 세운다니요."
"장군, 이건 기념비가 아니라 역사 문제입니다. 주정치국이 명령하고 저를 보낸 것이니, 그들이 더 잘 알 겁니다."
"오래 포즈를 취해줄 수는 없습니다."
"포즈는 필요 없습니다. 할 일 하시죠, 저는 여기 앉아 있겠습니다."
1941년 12월 이스트라 근처의 로코솝스키
주목할 점은, 그로부터 얼마 후 1942년 5월, 위원회 위원이자 훗날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역사학과의 교수가 되는 미하일 게라시모비치 세도프가 모스크바 티미랴제프 대학 병원에 입원한 부상 입은 로코솝스키를 방문해 인터뷰를 요청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코솝스키는 단호하게 말하기를 거부했다.
"제겐 회고의 시작점이 없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 오십시오."
그러나 가브릴로프는 운이 좋았다. 조각가와 그의 모델 사이에 빠르게 신뢰 관계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덕분에 위원회는 간접적이게나마 로코솝스키의 이야기가 담긴 녹음본을 받을 수 있었다. 이 대화를 주도한 사람은 정치위원 A.A. 로바초프였다.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를 조각하고 있으시지요. 모스크바 근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물어보십시오." 가브릴로프의 질문으로 대화는 시작됐다.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솔직하고 숨김없이 말해주십시오. 모스크바를 내줄 생각을 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없으십니까?"
"아시다시피, 없었습니다."
"그럴만한 동기나 근거가 있으셨습니까? 당시 군대 상황은 끔찍했지 않습니까."
"네, 끔찍했죠. 하지만 당신도 전직 군인이셨으니 아실 겁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감각이 있습니다. 당원인 제가 이런 말을 하기엔 좀 그렇지만, 저는 예감을 믿습니다. 정말로 깊이 믿습니다. 모스크바가 함락될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정말 평온했습니다. 독일군이 모스크바에서 물러나기 전날 밤, 저는 잠깐 산책을 나갔습니다. 그날 밤 잠을 잤는지 안 잤는지 모르겠습니다. 춥고 맑은 밤이었습니다. 저는 집들을 지나며 마을을 걸었습니다. 완벽한 정적이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독일군 쪽을 바라봤는데, 그쪽도 마찬가지로 조용했습니다. 그들의 조명탄이 번쩍이긴 했는데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저희가 이겼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도시가 구원받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몸을 돌려 오두막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전화가 울렸습니다. 다가가서 받았습니다.
"로코솝스키 장군인가?"
"네, 접니다,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그날 밤처럼 고요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 좀 어떤가?"
"괜찮습니다,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모든 게 좋습니다."
"증원군이 필요한가?"
"그러면 좋겠습니다."
"연대 하나만 보내줄 수 있네. 지금은 그것밖에 없네. 버틸 수 있겠나?"
"그렇습니다."
"좋은 밤 되게."
"편안한 밤 되십시오."
이 평온한 대화는 저를 완전히 안정시켰습니다. 두 시간 뒤, 차량으로 연대가 도착했고 해당 구역에 투입됐습니다."
로코솝스키는 또한 반격이 시작된 다음 날 스탈린과 나눈 두 번째 짧은 대화도 얘기했다. 그리고 큰 손실을 입으며 세 차례나 점령을 시도했던 이스트라 공격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판필로프 사단(제8근위소총사단)은 거의 전멸했다. 로코솝스키는 말했다. "판필로프가 (그때까지) 전사하지 않았다면 모든 게 잘 됐을 겁니다." 소련군은 이스트라 강을 건너 지뢰가 매설되고 얼음으로 뒤덮인 서쪽 강변으로 가야만 했다. 거기에 세 번째 공격 직전 독일군이 이스트라 저수지 댐을 터트려 강물이 불어나 유속이 초당 5~6미터에 달했다. "그래서 병사들은 부서진 오두막과 문짝을 이용해 뗏목을 만들기 시작했고, 일부는 영하 37도의 추위 속에서 헤엄쳐 건넜습니다. 거침없는 공격에 첫 번째 방어선이 즉시 돌파됐습니다."
가브릴로프는 '이 샤워 기간' 동안 몇 명의 병사가 병에 걸렸는지 물었다. 놀랍게도 로코솝스키에 따르면 감기에 걸린 병사는 8명뿐이었다고 한다.
"전투는 아침 7시에 시작해서 저녁 8시에서야 끝났습니다. 병사들은 흠뻑 젖은 상태로 도시에서 싸웠습니다."
로코솝스키는 전설적인 레프 미하일로비치 도바토르 장군의 죽음에 대해서도 가브릴로프에게 얘기했다.
"그 죽음은 분명히 누군가에 의해 유도된 것이었습니다. 도바토르는 익명의 편지를 받았는데, 그 편지에는 그가 겁쟁이여서 병사들만 공격에 보내고 자신은 본부에 앉아 지휘만 한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이는 명백한 거짓이었습니다. 장군은 가능한 모든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오히려 여러 차례 몸을 아끼라는 주의를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도바토르는 사흘 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로코솝스키 본인이 한 말이다.) 그리고 사흘 째 되던 날, 그는 부대를 이끌고 전투에 나섰습니다. 불행히도 그들은 독일군 기관총 부대와 맞닥뜨렸습니다. 많은 병사들이 쓰러졌고 도바토르도 첫 사격에 맞아 전사했습니다. 쓰러진 그를 구하거나 끌어내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독일군이 그 일대 전부를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밤이 돼서야 그를 끌어올 수 있었고, 그때까지 그는 살아있었습니다. 만약 부상 직후에 그를 구조했다면 살아남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는 많은 피를 흘리고 심한 동상 상태였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러했습니다. '그들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이 말은 편지를 보낸 자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사람이 죽었습니다."
로코솝스키는 판필로프와 도바토르가 죽으면서 '팔다리를 잃었다'고 말했다.
첫 방문 때 가브릴로프는 흉상을 완성하지 못했다. (그는 점토로 흉상을 빚고 스케치를 할 계획이었다.) 그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모스크바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전선에 총 20일간 머물렀다.) 그래서 그는 주정치국으로부터 두 번째 출장 허가를 받고, 1942년 2월 초에 떠났다. 제16군 사령부가 재배치됐기 때문에 그는 칼루가의 코젤스크-수히니치 지역으로 떠났다. 2월과 3월 내내 심한 눈보라가 지속되었고 눈더미로 인해 이동이 극히 어려웠다. 덕분에 카브릴로프는 해방된 지역의 상황을 자세히 파악하고 점령 기간의 세부 사항을 들을 시간이 생겼다. 조각가는 해방된 지 얼마 안 된 칼루가에서 며칠을 보냈다. 그곳 근처에서는 여전히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위원회 위원들과의 대화에서 조각가는 칼루가 여행에서 '아주 슬픈 인상'을 받았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는 도시가 해방되는 과정에서 독일군보다 소련군의 포격으로 더 큰 피해를 입었다고 말했다. 또한 '칼루가의 사소하고 불쾌한 세부 사항' 역시 '슬픈 인상'을 남겼다고 덧붙였다. 특수부서 보고서를 통해 가브릴로프는 도시 교회에서 독일군과 현지 여성들 간의 결혼이 52건이나 등록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도시 사령관이 독일군을 위한 사창가를 열 계획이고 이를 위해 80명의 여성이 필요하다고 발표하자 놀랍게도 250명이 자원했다고 한다. 소련군이 진입하자, 현지 여성들이 동거하고 있던 독일군 병사들을 집에 꽤 많이 숨겨 주었다. 조각가의 말에 따르면, 그가 본 마지막 독일군은 한 칼루가 여성의 집 궤짝 안에 오랫동안 숨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집주인의 어린 아들의 실수로 우연히 발견되었다. 특수부서는 이 모든 현상을 '도시에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칼루가에서 가브릴로프는 전쟁과 죽음이 어린이의 정신을 어떻게 뒤트는지에 대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 저는 언덕에서 썰매를 타고 있는 아이들을 보았습니다. […] 여섯 명의 아이들이 무리 지어 언덕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 아이들은 얼어붙은 '프리츠'를 타고 있었습니다. 다리는 잘려 있었고 장화는 벗겨져 있었습니다. 그는 물에 젖어 거름에 뒤덮여 있었으며, 코는 뜯겨 있었습니다."
마침내 조각가는 수히니치에서 로코솝스키를 만나 흉상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어느 날 가브릴로프는 로코솝스키가 작전을 계획하는 동안 즐거운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을 보았다.
...갑자기 두려움이 들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부대를 배치하고 있다. 내일이면 이 부대들 어딘가에서 작전이 벌어지고, 사람들이 죽고, 전사하고, 전차 안에서 비명횡사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노래에 맞춰 이루어지고 있다. 한 사람이 노래를 부르고, 그 뒤에는 죽음이 있다.
로코솝스키는 그의 심경을 알아차렸고, 가브릴로프가 이 생각에 대해 말하자 "어쩔 수가 없다."고 답했다. 로코솝스키는 이어서 정치위원은 끊임없는 폭음을 덮어버리기 위해 항상 축음기를 틀어놓는다고 덧붙였다.
가브릴로프는 로코솝스키가 '항상 자제하며, 놀라울 정도로 예의 바르며, 어떤 불필요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대화에서 어떤 꾸밈도 없는' 사람이었다고 강조했다. 가브릴로프는 그가 화를 내는 것을 딱 한 번 보았다.
"그는 갑자기 화를 내며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고 거칠게 욕을 했다. 나중에 그가 내게 말해준 바로는, 우리 부대가 포프코보 마을에 급습해 마을의 절반을 점령했지만, 공격 부대에 대전차 무기가 지급되지 않았고, 독일군이 전차 4대를 투입시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 작은 기술적 문제 때문에 작전이 실패한 것이었다."
두 번째 출장 기간 동안 가브릴로프는 로코솝스키 흉상 점토 스케치를 완성했고, 제16군 포병 사령관 카자코프 소장과 군사 위원회 위원 로바초프의 초상화도 완성했다. 모스크바로 돌아온 그는 붉은군대 중앙회관에서 열린 '붉은 군대 기념일'에 자신의 작품들을 제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