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번역] 로코솝스키 원수 증손녀 아리아드나 로코솝스카야 인터뷰 - 2024.05.09|작성자 쿠악이
붉은 광장에서 승리 퍼레이드를 지휘한 소련 원수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로코솝스키의 전기에 어떤 비밀들이 남아 있는지, 그의 폴란드에서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 그가 체포와 대숙청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왜 스탈린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렸는지, 주코프와는 화해했는지, 일상생활의 원수는 어땠는지를 포함한 다양한 이야기를 RTVI의 «특별 인터뷰»에서 원수의 증손녀이자 저널리스트인 아리아드나 로코솝스카야가 이야기했습니다. 그녀는 로코솝스키 원수의 회고록에서 검열당한 부분들을 복원한 책 '검열 없는 회고'의 편집자이자 기타 군 지휘관들에 관한 책의 저자입니다.
"그는 말을 너무 좋아해서 '베두인'이라는 별명까지 있었습니다."
Q: 아리아드나, 먼저 5월 9일을 맞이한 선생님과 시청자들께 축하를 전합니다. 가족들과는 이 기념일을 어떻게 축하하시나요?
A: 저도 전승절을 맞이한 모든 분께 축하를 전합니다. 로코솝스키 원수 기념 동상이 로코솝스키 대로에 건립된 이후로 우리 가족은 그곳에 가서 증조할아버지에게 헌화하는 전통이 생겼습니다. 따로 잔칫상을 가지진 않고, 동상 건립 이후 이런 새로운 전통이 생겼습니다.
Q: 5월 9일은 가족들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A: 당연히 저희 가족 역사에서 중요한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증조부에게도 이 날은 매우 중요한 날이었으니까요. 그는 독일의 항복 소식을 듣고 즉시 자신의 본부에 있던 전우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엔 축포도, 환호도, 포옹도 없었고 오히려 모두가 침묵했습니다. 이 전쟁동안 소중한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잃었는지 잊을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날은 비극적인 날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이 날은 그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었고 증조부는 나치 독일의 항복과 크게 관련 있기 때문에 우리 가족에게 이 날은 절대적으로 신성한 날입니다.
Q: 선생님께선 증조부를 직접 뵙지 못하셨겠죠. 하지만 선생님의 아버지(콘스탄틴 빌리예비치 로코솝스키)는 그를 기억하고 계시겠죠? 로코솝스키 원수가 돌아가셨을 때 그는 16살이었으니까요. 아버지께선 할아버지에 대해 어떤 이야기들을 해주셨나요?
A: 글쎄요, 증조할아버지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있을까요. 제가 아버지께 여쭤봤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냥 평범한 할아버지셨어, 단지 원수였을 뿐이지." 아버지의 학교가 국방부 근처에 있어서 종종 증조부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그를 학교에 데려다주곤 하셨습니다. 이에 관련된 재밌는 일화도 있습니다. 역사학자 쿠마네프에 따르면 그들은 수업 중에 친구들과 몰래 빠져나가 원수를 기다리곤 했다고 합니다. 증조부가 어떤 시간에 그 길을 지나가는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증조부가 나타나면 "안녕하세요,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라고 인사했고, 그러면 증조부는 경례하며 "좋은 아침이네."라고 답하셨습니다. 그 후 그들은 마치 임무를 완수한 듯한 기분으로 수업에 돌아갔다고 합니다.
증조부는 일상에선 매우 소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다차에는 작은 텃밭이 있었고 아버지가 어릴 때 그 텃밭의 일을 돕기도 하셨습니다. 그곳엔 무, 양파 같은 것들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증조부는 군 경험을 토대로 아버지에게 숲에서 방향을 찾는 법을 알려줬고, 버섯을 따는 법과 낚시하는 법도 가르쳐주셨습니다. 아버지가 조금 더 자랐을 때는 사냥에도 데려가셨다고 합니다. 정말 평범한 할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 순간이 몇 번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모스크바에서 차를 타고 이동할 때면 사람들이 앞좌석에 앉아 있는 로코솝스키 원수를 알아보고 인사하고, 소리치고, 경적을 울렸습니다. 그때 모스크바엔 차가 많지 않았고 느리게 움직였다고 합니다. 증조부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변했습니다. 그리고 승전 열병식... 소련 시절에 딱 두 번 있었습니다. 그땐 5월 9일에 승전 열병식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열병식 때 아버지는 국방차관이었던 할아버지를 레닌 영묘 단상 두 번째 줄에서 겨우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증조부는 겸손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앞에 나오지 않고 뒤 어딘가에 숨어계셨습니다. 그런 순간에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정말 특별한 사람이란 걸 느끼셨습니다.*
(* 소련 시절엔 전쟁 전부터 매년 노동절(5월 1일)과 혁명기념일(11월 7일)에 군사 열병식이 열렸음. 1945년 6월 24일 대독 승전 기념 열병식 이후 5월 9일 승전 열병식은 1965년, 1985년, 1990년에만 열렸으며 이후 1995년부터 매년 5월 9일마다 하게 됨. 로코솝스키가 국방차관을 지낸 때는 1956.11~1957.6이었으니 여기서 언급된 열병식은 56년 혁명기념 열병식이나 57년 노동절 열병식이었을 것임.)
하지만 일상에서 증조부는 매우 평범한 소시민이었습니다. 가족 행사 때 초대된 손님들이 전쟁 영웅인 로코솝스키의 군사적 업적을 찬양하고 건배하려고 하면, 증조부는 부드럽게 손님들을 진정시키고 우리가 왜 오늘 여기 모였는지 행사 이유를 상기시켜 주곤 하셨습니다. 증조부는 그런 걸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Q: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에 대한 새로운 정보(신뢰도는 다르지만)들이 계속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얼마 전 벨라루스의 역사학자들이 벨라루스 국립 자료실에서 로코솝스키 원수의 출생지에 대한 새로운 후보지를 뒷받침하는 증거를 발견했습니다. 새로운 증거에 따르면 그곳은 바르샤바도 아니고 벨리키예루키도 아니고, 벨라루스의 텔레하니 마을이라고 합니다. 가족분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거의 130년이 지난 오늘날 저희가 로코솝스키 원수가 태어난 곳이 어딘지 정확히 확신할 수 있을까요?
A: 우리 가족에겐 그가 바르샤바나 바르샤바 인근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확실한 사실입니다. 그의 모든 공식 문서도 그렇고, 증조부가 카르고폴 연대(러시아 제국 기병 연대로 로코솝스키가 처음 입대한 부대)에 입대했을 때도 바르샤바 근처 "코모로보의 시민"으로 기록되어 있었고 출생지는 바르샤바였습니다. 그의 모든 청소년 시절 서류도 마찬가지이며 1937년에 체포 되셨을 때, 바르샤바에서 태어난 전 폴란드인이라는 명목으로 조사가 시작됐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벨리키예루키는 1945년 증조부가 소비에트 연방 영웅을 2회 수훈한 뒤에 등장했습니다. 이 칭호의 규정에 따르면 수훈자의 고향 마을에 기념비가 세워져야 합니다. 1945년 6월 당시 폴란드 정부는 소련에 우호적이었지만 바르샤바에 그의 기념비를 세우는 것은 꽤 떨떠름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기념비를 세울 증조부의 새로운 고향이 만들어졌고, 그 새로운 출생지로 벨리키예루키가 선택된 것입니다.
벨리키예루키 근처의 두보크라이라는 영지는 로카솝스키 남작 가문의 소유였습니다. 아마 수 세기 전에 러시아로 옮겨간 로코솝스키 가문의 분파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성이 비슷하니 그곳이 선택된 것 같습니다. 현재 폴란드와의 관계를 고려해 보면 증조부의 기념비가 벨리키예루키에 세워진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벨라루스 역사학자들의 새로운 발견은 꽤 중요한 발견입니다. 증조부의 부모님이 텔레하니에서 만나 결혼하셨기 때문에 확실히 연관이 있습니다. 정확한 건 아니지만 그곳엔 유리 공장이 있었고, 증조부의 아버지가 그곳 유리공장 관리자였으며 아마 어머니는 유리공장 직원의 딸이었을 겁니다.
Q: 그들은 귀족이었나요?
A: 증조부의 아버지 크사베리 비켄타예비치 로코솝스키는 폴란드 귀족이자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콘스탄틴이라는 이름의 아기)의 출생 기록지에도 '아버지: 귀족, 가톨릭 신자'라고 적혀 있습니다. 어머니 안토니나 이바노브나 옵샨니코바는 러시아인이고 정교회 신자였습니다. 저희 가문은 텔레하니와 연관이 있고 증조부의 어머니가 그곳에 묻히셨습니다. 하지만 그 아기의 출생기록지는 7년의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도 17세를 10세로 착각할 수는 없습니다.
Q: 시청자분들을 위해 잠시 설명하겠습니다. 벨라루스 기록소에서 텔레하니 마을 교회 기록이 발견되었는데, 그곳에 로코솝스키 가족에 콘스탄틴이라는 이름의 아들이 태어났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아기의 출생기록은 1889년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이것이 로코솝스키 원수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A: 증조부는 1896년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항상 모든 서류에 이 년도로 기록하셨습니다. 자신이 7살이나 더 많다는 것을 모른다는 건 이상한 일입니다. 옛날엔 전통적으로 아기가 어릴 때 죽으면 다음에 태어난 아이에게 이름을 그대로 물려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콘스탄틴이라는 이름은 로코솝스키 가문에서 매우 흔했습니다. 콘스탄틴 삼촌도 있었고, 그의 할머니 이름도 콘스탄티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아기가 증조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7년은 너무 큰 차이입니다. 일부 문서에서 증조부의 출생 연도가 2년 정도 차이 나긴 했지만, 7년은 너무 많습니다...
Q: 그렇다면 텔레하니에서 태어난 콘스탄틴은 원수의 형제였을까요?
A: 네, 아마 아기 때 죽은 형일 것입니다.
Q: 로코솝스키 원수의 인생에서 밝혀내 보고 싶은 여백이 남아 있나요?
A: 그의 어린 시절 바르샤바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합니다. 왜냐하면 증조부의 어머니인 안토니나가 어느 순간부터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증조부의 친여동생인 헬레나는 바르샤바에 남아 평생 그곳에서 살았지만 그녀도 어머니의 행방을 알지 못했습니다. 증조부가 국방차관에서 물러나고 감찰관이 되셨을 때야 텔레하니에서 그의 어머니가 텔레하니에 묻혀계시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모든 것이 결국 그곳으로 이어집니다. 그녀는 어쩌다 거기까지 간걸까요?
증조부의 아버지는 그가 아주 어릴 때 철도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아이들은 친척들에게 보내졌고 증조부는 바르샤바 근처에 영지를 가지고 있던 삼촌에게 보내졌습니다. 삼촌 덕분에 그는 기병과 말에 대한 열정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증조부는 말을 타는 법을 배우고 말에 매료되어 경마장에 다녔습니다. 다른 소련 원수들이 구두공이고 서기였을 때 증조부는 경마장에 다녔다는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긴 합니다. 아무튼 그는 좋아하는 기수도 있었고, 그의 친구들은 증조부에게 기수의 초상화와 "우리 베두인에게"라는 글이 담긴 엽서를 주곤 했습니다. 그는 말을 너무 좋아해서 '베두인'이라는 별명까지 있었습니다.
Q: 그렇다면 원수의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건가요?
A: 기본적으로 어머니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왜 어머니는 아이들을 친척들에게 맡기고 텔레하니로 가버린 걸까요? 그녀에겐 콘스탄틴, 헬레나, 마리아라는 세 자녀가 있었습니다. 왜 아이들을 폴란드에 버려두고 벨라루스로 가버린 걸까요. 당시엔 모두 러시아 제국이긴 했지만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습니다. 모든 게 미스터리입니다. 안타깝게도 벨라루스 역사학자들이 다른 정보를 찾아내지 않는 한 우리는 영영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누구도 배신하지 않았고, 동료 수감자들에게도 버틸 것을 독려했습니다."
Q: 콘스탄틴 로코솝스키는 자신의 폴란드 정체성을 인식하고 있었나요? 그것이 그에게 어느 정도의 중요도를 차지했나요?
A: 물론이죠. 그는 항상 자신을 폴란드인이라고 썼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폴란드어를 잊지 않았습니다.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했습니다. 그가 폴란드를 떠났을 때는 이미 18세였습니다. 그는 언제 어디서든 폴란드인들과 소통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증조부는 폴란드인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셨습니다. 그는 1937년에 폴란드와 일본 정보 기관에 협력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크레스티' 감옥에 수감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붉은군대에 입대한 후 한 번도 소련 서부에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증조부는 항상 소련 서부에서 일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는 주로 시베리아와 자바이칼 지방에서 복무하셨는데 그곳은 고향과 차이가 많은 낯선 땅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서쪽으로 가고 싶어 했지만 그의 출신 때문에 서부로 보내지지 않았고 마침내 1936년에 서쪽으로 갔지만 1937년에 체포되셨습니다.
Q: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회고록 '군인의 의무'는 선생님의 편집을 거쳐 무검열판으로(책 '검열 없는 회고') 출판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의 시작은 꽤나 평화로운 문구로 시작합니다. "1940년 봄, 나는 가족과 함께 소치에 방문했다." 배경을 모르는 분들을 위해 설명해 드리자면, 그때 로코솝스키는 막 감옥에서 2년 반을 지내다 나온 몸이었습니다. 이 회고록은 제가 알기로 흐루쇼프가 아닌 브레즈네프 시대에 쓰였습니다. 그런데 왜 여전히 체포와 숙청, 고문과 관련된 부분을 통과시키지 않은 걸까요?
A: 왜냐하면 그런 부분은 처음부터 없었기 때문입니다. 증조부는 의도적으로 회고록을 1940년부터 시작했습니다. 사실 스탈린 격하운동 때 흐루쇼프는 증조부에게 스탈린에 대해 "더 어둡고 풍성하게" 써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증조부는 거절했습니다. 아마 그가 스탈린을 미친 듯이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죽은 사자를 걷어차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 러시아 속담 '죽은 사자는 당나귀도 걷어찰 수 있다.': 사자가 살아있을 때는 근처도 가지 못하던 당나귀가 사자가 죽자 마음껏 걷어차는 비겁한 행태를 이르는 말.)
그리고 스탈린에 대한 증조부의 태도는 상당히 모호했습니다. 그는 당연히 그 모든 일이 스탈린의 승인하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탈린은 전쟁동안 증조부에게 도움을 주고, 그의 의견을 듣고 편을 들어주고, 때로는 스타브카가 반대할지라도 증조부를 지지하며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탈린에 대해 이중적인 감정을 가졌습니다. 저는 그가 단순히 불 속에 장작을 던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증조부는 1941년 여름에 재앙이 일어난 이유에 대해 여러 생각들을 썼습니다. 그는 재앙의 여파가 소련군의 핵심 인력에게 충격을 줬다고도 언급했지만 이후 이 부분을 스스로 삭제했습니다. 저는 용기를 내어 해당 부분을 복원했습니다. 검열이 아닌 증조부 스스로 삭제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는 이 주제를 건드리지 않기로 한 것 같았습니다.
Q: 로코솝스키가 스탈린의 장례식에서 울었다는 건 사실인가요?
A: 네, 사실입니다. 저는 그가 스탈린 시대와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흐루쇼프는 전혀 다른 성격의 인물이었고 증조부와 관계가 좋지 않았습니다.
Q: 그 시기 로코솝스키의 인생에서 체포와 숙청을 뗄 수는 없습니다. 선생님은 그가 그 일에 무슨 반응을 보였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는 아예 잊으려 했을까요?
A: 처음에 그가 투옥되기 전, 공산당에서 퇴출당했을 때 증조부는 보로실로프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수많은 장교들 앞에서 피땀 흘리며 수년간 복무한 결과 소비에트 연방의 인민이라 불릴 자격을 얻었음에도, 어째서 소련은 저를 신뢰할 수 없는 자로 분류한 겁니까?" 그에게 당 퇴출은 매우 충격적이었고, 극심한 불공평함을 느꼈습니다.
그는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사건이 시작되기 전에, 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으로 임명된 파벨 디벤코 장군이 모든 군단 사령관들을 소집하여 각자 가장 우수한 중위 두 명을 부관으로 뽑고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가르치고 인수인계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터무니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미 1차세계대전과 내전 경험이 있는 전문 군사 지휘관들이 있는데, 중위에게 그들이 아는 모든 것을 가르치라뇨? 누군가가 디벤코에게 "저희는 어디로 가게 되는 겁니까?"라고 물었고, 디벤코는 "걱정말게, 자네들을 위한 자리는 따로 마련될 것이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증조부는 "정말로 우리 모두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었다. 곧 디벤코도 우리를 뒤따랐다."라고 썼습니다.
그는 분명 끔찍한 불공평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후 일어난 일들로 무너지지 않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극복하는 것도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는 1940년에 석방됐고, 1941년엔 죽음을 각오하고 모스크바에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는 모든 것을 잊어야 했습니다. 증조부는 어떻게든 스스로를 설득했습니다. 그는 회고록 초안에 "적이 의심을 심었다."라고 적었습니다. 여기서 적이란 나치 독일을 의미했습니다. 그는 이 때문에 군대 내에서 중상모략, 음해, 질투가 만연했다고 합리화했습니다. 그리고 전후엔 다시는 그 일을 떠올리지 않았고 얘기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마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얘기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포병 원수 카자코프의 아내는 나중에 로코솝스키가 감옥에서 구타당했으며 두 번이나 처형장으로 끌려가 공포탄을 맞았다고 전해줬습니다. 증조부는 이 이야기를 오직 바실리 카자코프에게만 했고 가족에게도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할머니(로코솝스키의 딸)가 왜 항상 파울루스 원수에게 받은 브라우닝 권총을 지니고 다니는지 물었습니다. 증조부는 할머니에게 솔직하게 답했습니다. "그들이 날 다시 잡으러 온다면 죽을 때까지 항복하지 않을 거다."
제가 생각하기에 그가 공산당에 계속 헌신하려면 -그는 공산당에 헌신했으며 모든 공산주의 이상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 일을 어떻게든 극복하거나 기억 저편으로 묻어야 했을 겁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는 전선에서의 모든 정치범들의 죄를 속죄하고 전과를 없앨 기회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상을 받을 기회까지 제공했습니다. 이는 거의 누구도 허용하지 않던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증조부는 그들을 사회에 복귀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전후 그의 매우 가까운 친구였던 텔레긴 장군이 '주코프 사건'으로 체포됐을 때 증조부는 텔레긴을 감옥에서 빼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습니다. 그는 텔레긴에 대한 어떠한 혐의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런 사건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가족에게는 그때 텔레긴이 감옥에서 보낸 편지가 남아있습니다. 그는 "자네는 내가 유죄라는 걸 믿지 않는다고 들었네. 정말 고마워, 코스챠."라고 썼습니다. 텔레긴의 가족들은 모든 군사 지휘관들에게 연락했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오직 증조부만이 진실을 알고 텔레긴의 복권을 이끌어냈습니다.
Q: 그리고 그는 고문받을 때 그 누구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드문 경우죠, 그렇죠?
A: 맞습니다. 그는 누군가를 배신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모든 동료 수감자들에게 아무것도 서명하지 말고, 누군가에게 불리한 증언도 하지 말 것을 촉구했습니다. 만약 죽어야 한다면 누구도 끌고 가지 않고 깨끗한 양심으로 죽을 것을 독려했다는 수많은 증언들이 있습니다.
Q: 로코솝스키를 누가 고발했는지는 아시나요? 아니면 역사는 이 사건에 대해 침묵하고 있나요?
A: 물론 우린 고발자를 모릅니다. 기록이 있었지만 파기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쉽게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어쨌든 지금 그 정보가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요? 알지 않는 게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아마 제 증조부는 누가 배신자인지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후 많은 고위급 장군들이 그러한 서류에 접근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실질적인 의미는 없습니다.
"그는 죽기 전 주코프와 포옹했습니다."
Q: 소련 검열관들이 그의 회고록에서 무엇을 잘라냈나요?
A: 우선 전쟁 시작 전 상황에 대해 쓴 내용이 거의 전부 삭제됐습니다. 증조부는 감옥에서 석방된 후 키예프 특별 군관구로 배치되어 독일 국경과 가까운 노보그라드-볼린스키 시로 보내졌습니다. 그는 그 지역에서 전쟁 직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서술했습니다.
그는 군대 내에 이상할 정도의 평온함이 감돌았고, 소련에 이주하겠다고 오는 낯선 사람들이 있었다고 회상했습니다. 민간인 복장을 한 독일 장교들이 독일인 무덤을 찾겠다며 자주 오갔습니다. 한번은 독일 비행기가 비상 착륙했고, 비행기 안에서 미처 제시간에 처리하지 못한 소련 국경 지역을 촬영한 필름이 발견됐습니다. 키예프 군관구에 이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묻자 돌아온 답은 독일인들을 풀어주고 국경까지 호위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부분은 매우 비판적으로 적혔습니다. 증조부는 비행장이 국경 바로 옆에 위치해 있는 점을 불평했습니다. 그는 전쟁 첫날 모든 비행기가 폭격에 당한 것을 발견했고 어째서 머리 위로 우리 공군의 폭음을 듣지 못한 건지 깨달았습니다. 그는 기존 요새를 두고 새로운 요새에 자리 잡을 시간이 없었으며, 병력을 기존 요새로 후퇴시켜 방어를 강화하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계획에 따라 모두를 앞으로 내던져버린 것에 대해 비판했습니다.
그때 증조부는 기계화군단을 지휘했는데 그 군단은 30%만 기계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장비가 거의 없었고 기계화군단은 전쟁 첫날부터 도보로 이동했습니다. 그는 평생동안 이렇게 많은 차용증에 사인해 본 적이 없다고 회상했습니다. 증조부는 병사들을 태우기 위해 노보그라드-볼린스키 시에서 트럭과 버스 같은 교통수단들을 징발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걷는 것뿐만 아니라 무거운 포도 끌고 가야 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전차는 훈련용으로 매우 낡은 것들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훈련 중에도 이 전차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증조부는 이런 것들에 대해 꼭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주로 국경 근처에서 복무했기 때문에 (체포된 곳도 프스코프였는데 이곳 역시 국경 지대였습니다.) 당시 독일 국경 지역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증조부는 소련이 전쟁에 대비되지 않아 독일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이해했지만, 이 역시 독일의 계획 중 하나라는 것 또한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전쟁 직전 상황을 꽤 비판적으로 서술했고 결국 모든 것이 검열됐습니다. 지금은 검열된 모든 부분을 읽을 수 있습니다...
Q: 선생님의 책 '검열 없는 회고' 말씀이신가요?
A: 제 책뿐만 아니라 90년대 후반 이후에 출판된 증조부의 모든 회고록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증조부가 회고록을 만드실 때 속기사는 2부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는 정치국으로 보내져 검열을 받았고, 하나는 증조부가 간직했습니다. 그렇게 원본 사본을 상속인인 저희 아버지와 삼촌이 물려받으셨고 후에 복원될 수 있었습니다.
둘째로, 증조부는 스타브카 대리인의 역할에 매우 비판적이었습니다. 여기서 대리인이란 게오르기 콘스탄티노비치 주코프를 뜻합니다. 증조부는 이 직책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대리인이라면 이론적으로 모스크바에 앉아 여러 전선들의 행동을 조율해야 했지만, 실제로 주코프는 항상 전선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주코프는 자신이 있는 전선이 제일 중요하다고 느끼고, 모든 주요 사건이 그곳에서 벌어진다고 생각하며 권한을 휘둘러 다른 전선군에서 병력을 뺏어왔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증조부가 제16군에서 브랸스크 전선으로 전출되어 처음으로 전선을 지휘하게 됐을 때 스탈린에게 호출됐습니다. 이것이 증조부가 스탈린과 가진 첫 면담이었습니다. 스탈린은 그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브랸스크 전선의 지휘를 맡기며 임무를 배정했습니다. 대화가 끝나고 스탈린이 말했습니다. "가지 말고 앉아 있게." 의자에 앉아 있자 다른 지휘관이 들어왔습니다. 아쉽게도 그 지휘관이 누구였는지는 기억하지 못하셨습니다. 스탈린이 그 지휘관에게 물었습니다. "말해보게, 왜 그렇게 큰 재앙이 자네 전선에서 발생한 건가?" 지휘관이 대답했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이오시프 비라시오노비치, 동지의 대리인(주코프)이 있었습니다." 스탈린이 답했습니다. "누가 전선을 지휘했나?" 지휘관이 말했습니다. "제가 지휘했습니다만, 그 일은 동지의 대리인이 결정한 것입니다..." "왜 자네는 대리인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허용한 건가?"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그는 최고사령관 대리 아닙니까." "그렇다면 통신으로 내 대리인이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고 알려주지 그랬나?" "어떻게 제가 동지의 대리인에게 그런 식으로 불만을 표출할 수 있겠습니까?" 스탈린이 끝으로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자네는 더 이상 전선사령관이 아니군." 증조부는 이것이 교훈임을 알았습니다. '전선은 자신이 지휘해야 한다.'
증조부는 대리인들, 특히 게오르기 주코프가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매우 불만이었습니다. 물론 주코프는 야전 사령관이고 그가 전선을 지휘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주코프가 '대리인'으로서 다른 전선군에 방문하면, 그는 전선군 사령관의 역할을 대신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일이긴 했습니다. 주코프는 자신이 결정을 내리고 싶어 했습니다.
Q: 즉 로코솝스키와 주코프 사이의 불화는 루머가 아니라 실화였다는 건가요?
A: 불화는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1924년 레닌그라드에서 함께 공부할 때부터 서로를 알았습니다. 그들은 미래의 원수들인 예료멘코와 바그라먄과 함께 기병 지휘관 교육 과정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둘의 차이는 분명했습니다. 증조부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 게오르기는 항상 바닥을 기어다니며 지도 위에 뭔가를 그리고 있었다." 물론 지휘관이 지도위에 뭔가를 그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 표현에서 뭔가가... 느껴졌습니다.
Q: 비꼰 거군요.
A: 그렇죠. 마치 "우리는 곳곳을 돌아다녔는데 게오르기는 바닥이나 기어다녔다."같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에 대한 열정이 그들을 결속시킬 수 있었습니다. 주코프도 뛰어난 기병이었고 다양한 대회에 참가했습니다. 주코프의 딸 에라와 엘라 주코바에 의하면 그때 아버지가 각종 승마 대회에서 받은 수많은 상을 들고 부대를 옮겨 다녔다고 했습니다. 학창 시절에 전학만 11번 했다고 하니 얼마나 옮겨 다녔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말은 증조부와 주코프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삶의 일부였습니다. 나중에 그들은 말을 타고 붉은 광장에서 같이 승전 열병식을 지휘했습니다. 하지만 분명 불화는 존재했습니다. 기본적으로 그들의 위치는 역사의 흐름에 따라 바뀌었습니다. 예를 들어 1930년대 초반에 증조부는 연대장이셨고 주코프는 그 아래 대대장이었습니다. 그 후 증조부는 체포되셨고 주코프는 할힌골의 영웅이 됐습니다. 증조부가 석방되고 노보크라드-볼린스키에서 기계화군당장으로 임명됐을 때 주코프는 키예프 군관구 사령관이었습니다.
그들 사이의 갈등은 훨씬 나중에 시작되었습니다. 전쟁 초반 1941년, 주코프가 서부전선군을 지휘하고 증조부는 '로코솝스키군'이라고 불리던 제16군을 지휘할 때부터였습니다. 첫째로 주코프는 -증조부가 썼듯이- 참을 수 없을 정도의 무례함을 보였습니다. 책 '브레스트 요새'의 작가 세르게이 스미르노프가 표현했듯이 주코프의 그런 강경함은 그가 맡은 책임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에게 모스크바를 포기할 것인지 지킬 것인지가 달려있었습니다.
반면에 증조부는 상황이 어려울수록 상관이 부하에게 큰소리치면 안 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반대로 그런 상황일수록 부하를 격려하고, 확신을 심어줘야 하며 패닉을 조장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불행히도 주코프는 부하들을 위협했지만요. 특히 볼로콜람스크가 함락됐을 때 -모두가 알다시피 증조부의 잘못이 아니라 이곳을 방어할 예비군이 없었습니다.- 주코프가 조사위원회를 보내자 증조부는 이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조사위원회는 당연히 도시를 지킬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지휘관들의 책임이 없다고 결론 내렸지만, 이후로 증조부에게 본부로부터 "그렇게 하면 군사재판에 회부될 것이다.","사수하지 못하면 재판에 넘기겠다."등의 위협이 계속 날아들었습니다.
주코프는 증조부를 잘 알고 있었고, 그가 훌륭한 지휘관이며 어느 한 지점을 사수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증조부가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정말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증조부는 정말로 재판에 회부될 뻔했습니다. 그 유명한 판필로프 사단의 판필로프 장군에게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고, 증조부는 판필로프 장군에게 '온건한 태도'를 보였다는 이유로 서면 경고를 받았습니다. 며칠 뒤 판필로프 장군은 전사했습니다. 증조부는 회고록에서 "죽을 때까지 싸워라."라는 명령이 유행처럼 번졌고, 이러한 명령을 내리는 이유는 "난 이런 명령을 내렸으니, 이후의 일은 내 잘못이 아니다."라는 상부의 자기 보호 때문이었다고 쓰셨습니다.
증조부는 가장 힘든 시기에 자신을 불신하고, 지나친 무례한 태도를 보인 주코프에게 큰 불쾌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스탈린은 오직 증조부와 샤포시니코프만 이름과 부칭으로 불렀습니다. 스탈린은 증조부가 '폴란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친근한 태도보다 정중함을 갖추는 게 더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스탈린은 항상 증조부에게 특별한 존중을 보였고 그건 가장 힘들었던 모스크바 공방전 시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Q: 말년엔 주코프와 화해하셨나요?
A: 1955년 바르샤바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주코프는 소련을 대표해 서명했고 증조부는 당시 폴란드 국방부 장관으로서 폴란드 인민공화국을 대표해 서명했습니다. 주코프가 폴란드에 갔었죠. 저는 한때 당시 증조부의 집무실을 경호했던 군사정보부 출신 체슬라프 키시악이라는 전 폴란드 내무부 장관과 얘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키시악의 보고서에 따르면 주코프와 증조부는 서명을 완료한 후 같이 집무실에 들어갔는데, 술이 있었는지 밤새도록 집무실 안에서 소리 지르고, 웃고, 욕하고, 다시 웃다가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른 아침 주코프와 증조부는 술에 취해 서로를 끌어안고 집무실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두 분은 다른 군관구를 지휘하거나 모스크바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서로를 많이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의 관계는 다양하게 발전했습니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증조부가 돌아가시기 직전 1968년이었습니다. 이때에 대한 정보는 다소 엇갈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바르비하 요양소에서 만났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크렘린 병원에서 만났다고 합니다. 어쨌든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만남임은 분명합니다. 증조부가 주코프를 끌어안고 말했습니다. "안녕히, 게오르기." 그리고 둘은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Q: 정말 감동적이네요.
A: 그렇죠. 이 대화의 목격자들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모든 바르샤바에서의 추억이 눈앞에서 사라졌습니다."
Q: 올해 7월 3일은 벨라루스 해방 80주년입니다. 바그라티온 작전이었죠. 이 작전에서 선생님의 증조부께서 제1벨라루스전선군을 지휘하셨습니다. 이와 관련해 가족들에게 어떤 기억이 남아있을까요? 전투보단 일상적이었던 순간이 더 많을까요?
A: 일상적인 측면에서의 유일한 기억은 바그라티온 작전과 관련 없고, 그 앞에 있었던 고멜-레치차 작전에 관련된 겁니다. 전쟁이 발발한 이후 처음으로 가족 전체가 모였을 때였습니다. 증조모와 할머니(로코솝스키의 아내와 딸)가 증조부가 있던 전선으로 갔고 해방된 고멜 전선 본부에서 1944년 새해를 함께 축하했습니다. 정말 밝고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당시 모든 소련 사람들이 전선에 있는 가족을 만날 수 있었던 건아니었으니까요.
그리고 바그라티온 작전은 제 생각에 -증조부도 그렇게 생각하셨다고 믿습니다.- 그의 군 경력 중 가장 빛나는 시기였다고 생각합니다. 기량의 정점이었습니다. 1944년 6월 29일 이 작전의 계획을 세운 것만으로도 소련 원수로 진급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초반에 증조부가 스타브카의 비판을 받았었다는 얘기를 드렸었죠. 증조부의 작전은 매우 파격적이었습니다. 증조부는 독일군이 예상 못한 늪지대에서의 공세와 독일군이 공격을 예상하고 있는 지점을 공세하는 두 가지 주공세를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스타브카는 "손바닥 펼치듯 여러 지역에 힘을 분산시키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답했습니다. 바실렙스키와 주코프같은 권위 있는 지휘관들의 반대에도 부딪혔습니다. 증조부도 이 작전이 군사 전략을 반한다는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전선군 군사위원회는 이것이 민스크를 신속하게 해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민스크가 목표 방향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전략은 성공했습니다.
바그라티온 작전엔 4개의 전선군과 약 20만 명의 파르티잔이 참여했으며, 이들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증조부의 작전은 매우 창의적이었습니다. 늪지를 통과하기 위해 병사들을 위한 짚으로 만든 늪에 빠지지 않는 신발과 포를 운반할 도구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늪지를 건너기 위해 특별한 플랫폼도 추가로 구축하고, 전차를 위한 전차 훈련장이 마련됐습니다. 전선에서 전차 사단이 철수하여 경로를 따라 늪지를 통과하는 훈련을 진행했습니다.
완벽한 위장이 이루어졌습니다. 4개 전선군의 모든 통신이 침묵했습니다. 독일군은 우크라이나에서의 공세를 예상하고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명령은 직접 대면으로만 이루어져 전파 통신엔 아무것도 오가지 않았습니다.
증조부의 참모장이었던 미하일 말리닌 장군은 기발한 발상을 잘했습니다. 그는 위장 작전을 위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고안했습니다. 영화 '소란스러운 농장'처럼 그들은 가짜 비행장을 만들었습니다. 비행기들은 이륙해 특정한 곳으로 날아갔고 그곳에 가짜 비행장을 설치했습니다. 전선군은 조금씩 병력을 전선으로 이동시켜 공세를 준비하면서 독일군이 눈치채지 못하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모든 병력이 엄중한 분위기 속에 밤에만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병사들은 작전이 시작되기 4일 전에서야 공세가 준비 중이라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소문이 퍼지지 않았습니다.
Q: '창의적인' 분위기였다고 할 수 있겠네요.
A: 네, 증조부는 이런 것을 장려하셨습니다. 그는 아래에서부터 나오는 다양한 아이디어들을 지지했습니다. 한번은 알렉산드르 베크라는 훌륭한 기자가 증조부를 만나러 전선군에 방문했습니다. 증조부는 그에게 전선군 사령관의 역할은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베크가 "그럼 동지는요?"하고 묻자 증조부는 "잘 듣고, 잘 보는 훌륭한 심리학자가 돼야겠지."라고 답했습니다.
Q: 벨라루스 다음은 폴란드였죠. 그리고 2차세계대전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극적인 순간이자 증조부의 군사 경력에도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1944년 8월 1일에 시작된 바르샤바 봉기죠. 이 봉기는 10월에 나치에 의해 진압됐습니다. 올해는 봉기 80주년이고 폴란드도 이날을 기념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많은 폴란드 역사가와 일부 러시아 역사가가 로코솝스키가 이때 비스와 강 반대편에서 군대들과 함께 있었으면서 봉기를 돕지 않았다고 비난합니다. 이러한 비난이 얼마나 정당하다고 생각하시나요?
A: 먼저, 증조부에게는 예레미 비시니오비에츠키 공작(16세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군사 지휘관)처럼 개인 군대가 없었다는 사실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부하들을 데리고 마음대로 봉기자들을 도우러 갈 수 없었습니다. 그가 지휘하는 건 소련 전선군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전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면 정확히 1초 뒤에 군사재판에 회부됐을 것이고 그의 빈자리에 새로운 사령관이 와 "후퇴하라"고 명령했을 것입니다.
저는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장군이 죽기 전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영광스러운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는 제게 바르샤바 봉기는 3가지에 맞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리적인 측면은 당연히 나치 독일에 맞섰고, 도덕적인 측면에선 폴란드를 버린 동맹국에, 정치적 측면에선 소련에 맞서고 있었습니다. 봉기자들의 목표는 소련군이 도착하기 전에 바르샤바를 해방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소련은 그들을 도울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계산은 정확했습니다. 이게 바로 그때의 상황이었습니다.
1944년 8월 말에 증조부는 영국 언론인 타임즈와 BBC 특파원 알렉산더 베르트와 인터뷰했고, 왜 봉기를 돕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답했습니다. 바그라티온 작전은 세계 역사상 가장 최단기간에 기록적인 거리를 해방한 작전이었습니다. 이 작전으로 벨라루스와 폴란드의 1/4가 해방됐습니다. 여기부터는 증조부의 인터뷰 답변을 인용하겠습니다. 그는 "우리는 치열한 전투를 통해 벨라루스와 폴란드의 1/4을 해방했습니다. 그리고 붉은 군대도 지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비군도 없고 전선은 늘어졌으며 벨라루스에서는 여전히 전투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독일군은 모든 대도시를 요새화했고 전투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브레스트는 7월 28일에야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Q: 즉 군대가 지쳤기 때문이었다는 건가요?
A: 완전히 지쳤죠. 7월 28일 브레스트가 해방됐고 8월 1일에 봉기가 시작됐습니다. 그들이 괜히 이때 봉기를 시작한 게 아닙니다. 폴란드인들은 소련군이 지금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지금이 스스로 조국을 해방할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계산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증조부에게도 이 사건은 두 가지 의미에서 비극이었습니다. 첫째로 바르샤바는 그의 고향이었습니다. 고향이 체계적으로 파괴되는 모습을 무심하게 지켜보기란 불가능합니다. 봉기가 시작된 후 파시스트들은 도시와 주민들을 전멸시키는 것을 목표로 세웠습니다. 매일 형벌대가 한 집의 마당에 들어가 모든 거주민들을 거리로 내쫓고 판자에 묶어 불에 더 잘 타도록 한 다음 총을 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바르샤바가 해방된 후 우리 조종사들이 바르샤바의 모습을 하늘에서 영상으로 찍어 남겼습니다. 온통 돌무더기였고 중앙에는 아주 평평한 평지가 있었는데, 그곳은 바르샤바의 게토 구역이었습니다.
Q: 그곳에 친척들이 남아있었나요?
A: 네, 증조부의 친여동생인 헬레나가 바르샤바에 남아있었습니다. 그는 30년 동안 그녀를 보지 못했고 다시 만나기만을 고대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더이상 제1벨라루스전선군을 지휘하지 않고 있을 때 여동생을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바르샤바엔 여동생뿐만 아니라 많은 친척들과 학교 친구들, 첫사랑까지 남아있었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모두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게 눈앞에서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것과 별개로 증조부는 봉기 조직자들의 행동에 분노했습니다.
사실 폴란드에서도 바르샤바 봉기에 대한 명확한 입장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무기도 없이 일어나 파시스트 점령에 맞섰던 시민들의 위업은 절대적으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런던에 있던 미코와이치크 정부(1943-1944년 폴란드 망명 정부의 총리)와 바르샤바의 부르-코모로프스키 장군(폴란드 군 지휘관)이 내린 정치적 결정에 대한 평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결국 그들은 목표를 이루지 못했고, 나치가 도시를 완전히 파괴했습니다.
그리고 비무장으로 맞서 싸운 시민들은 매우 영웅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분명 소련군이 도우러 와주리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소련군은 가까이 있었고 일부 부대는 이미 비스와 강 건너편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움을 원치 않는 정치적 세력이 있었습니다. 증조부는 봉기가 시작됐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그와 연락을 시도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도움이나 지원을 요청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증조부는 뒤늦게 정보부로부터 소식을 들었습니다.
8월 중순이 되고 폴란드 국내군 지휘부가 스스로 봉기를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야 증조부에게 연락이 닿았습니다. 그는 런던의 미코와이치크와 연락했고, 런던의 미코와이치크는 모스크바의 스탈린에게 연락했고, 스탈린은 바르샤바 근처에있는 증조부에게 연락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가교'가 이루어졌습니다.
증조부는 자신이 바르샤바를 해방할 것을 기대했기 때문에 그들이 봉기를 일으킨 것에 매우 화가 나셨습니다. 그는 파괴된 바르샤바가 아니라 온전한 고향을 해방하고 여동생을 다시 만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군대는 휴식을 취해야 했고 예비군을 보충하고 재편성해야 했습니다. 모든 준비를 마치면 8월 중순쯤에 해방작전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소련군은 미코와이치크와 부르-코모로프스키의 명령이 아닌 자신들만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탈린은 소련에 적대적인 폴란드 국내군과 독일군이 서로 싸우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개입할 필요성이 없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폴란드 국내군은 소련에 우호적인 세력이 아니었습니다. 이전에 카틴 학살이 있었고 폴란드의 모두가 카틴 학살의 배후가 어디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러시아와 폴란드 사이에는 다양하고 수많은 전쟁이 있었고 이 두 나라는 결코 우호적인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폴란드 국내군은 명백히 소련에 적대적인 무장 세력이었습니다. 스탈린에게 소련군이 바르샤바에서 독일과 싸울 때 뒤에서 칼을 꽂을 수 있는 제3의 세력이 사라진다는 건 기꺼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정치적인 이유로 증조부의 군대 진격이 늦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증조부에게도 매우 힘든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Q: 그의 회고록에서 그런 감정이 느껴졌습니다.
A: 네, 베르트와의 인터뷰를 보면 증조부가 봉기를 일으킨 조직자들에게 얼마나 분노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그것을 "모험"이라고 표현하며 우리가 바르샤바를 해방해야 했고 해방시킬 수 있었던 유일한 힘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직접 인용하자면 "부르-코모로프스키는 마치 서커스에서 카펫에 싸인 빨간 머리 광대처럼 굴러들어 왔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들에게 얼마나 분노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불행히도 이는 증조부의 통제 밖이었고 역사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법원을 통해 재매장을 시도했었습니다."
Q: 현재 폴란드에서는 로코솝스키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나요? 전후 폴란드 원수였던 그를 알고 있긴 할까요?
A: 거의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도 부정적인 시각이 일반적입니다. 증조부의 초상화가 각 학교에 걸려있었기 때문에 나이 많은 세대는 압니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안다고 해도 대게 '러시아 장군'이라고 생각하죠. 사람들은 그가 폴란드인이라는 것, 폴란드어를 할 줄 알았다는 것, 성인 때까지 폴란드에서 살았다는 것, 그곳에 가족이 있었다는 것, 전후 1945년부터 1949년까지 레그니차에서 북부군을 지휘했고, 1949년부터 1956년까지 폴란드 국방장관이었던 사실을 얘기하면 매우 놀라워합니다.
Q: 기록을 들어보면, 그가 폴란드 억양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A: 맞아요. 승전 열병식 때 잘 들어보면 "모스크바 방위군!"이라고 외치는 부분에서도 억양이 드러납니다. 확실히 폴란드 억양이 있었습니다.
Q: 일반적으로 로코솝스키에게선 소련적이지 않은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그는 아마 가장 매력적인 군 지휘관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군 지휘관들은 보통 가십적인 루머에 잘 등장하지 않지만, 로코솝스키는 그랬죠. 그와 여배우 발렌티나 세로바와의 로맨스는 루머인가요, 사실인가요? 개인적으로 저는 이 소문에 관심이 없지만 계속해서 이 소문이 들려옵니다. 그러니 이제 이 문제를 확실히 해봅시다.
A: 저는 이 질문이 조금 다른 이유로 신경 쓰입니다. 일단, 아뇨. 당연히 이 소문은 사실이 아닙니다. 수많은 역사가들이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사건은 증조부가 1942년 3월 8일에 중상을 입었을 때 시작됐다고 합니다. 그는 파편에 맞아 척추, 간, 폐가 손상되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처음엔 코젤스크로 이송됐고 이후 모스크바 고위직들을 위한 티미랴제프 대학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소문에 따르면 그곳에 발렌티나 세로바가 왔다고 합니다.
저는 그녀가 거기에 갔다는 거 자체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땐 TV나 인터넷이 없었기 때문에 모스크바의 배우들이 병원들을 돌아다녔습니다. 불쌍한 전사들을 어떻게든 격려하고 응원하기 위해서요. 정말 멋지고 감사한 일이었죠. 그녀는 그곳에 있던 특정 환자를 위한 공연을 위해 초대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저희 증조부와 만나 사랑에 빠졌다고요... 글쎄요, 여기서 모든 이야기가 무너집니다. 그녀는 그럴 수 없었으니까요.
전쟁 초기 모스크바 전투 중에 증조부는 가족을 잃어버렸습니다. 그의 부관이 키예프에서 증조모와 할머니를 모스크바행 기차에 태웠는데, 기차는 방향을 틀어 카자흐스탄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오랜 시간 떠돌아다녔고 증조부는 가족이 모스크바에 도착했는지 알지 못했고 여러 곳에 편지를 보내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가족이 나치 점령하의 키예프에서 무사히 탈출했다는 보장도 없었죠. 그렇게 가족들의 행방을 모르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시기 증조부는 군의관 갈리나 탈라노바를 만났습니다. 증조부가 매우 아름답고 다정했던 그녀를 사랑했다는 건 확실합니다. 그 둘은 1944년까지 전쟁 내내 함께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부상당하고 이송됐을 때 당연히 갈리나 탈라노바도 함께 모스크바의 병원으로 갔습니다. 그녀의 경력에도 티미랴제프 대학병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증조모와 할머니도 증조부가 중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 피난 가 있던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즉시 모스크바로 향했습니다.
그러므로 중상을 입은 그의 곁에 아내와 애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심하게 다친 상태에서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걱정했습니다. 개방적인 유럽같은 중혼은 꿈도 못 꿨습니다. 절대 안 됐죠. 만약 그러려고 했다면 증조모가 병원 침대에서 그를 목 졸라 죽였을 겁니다.
Q: 세로바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겠군요.
A: 그렇습니다! 이미 삼각관계였는데 거기에 새로운 여자를 추가하는 건 너무 과합니다. 사실 증조부는 수줍음이 많았고 특히 여자와의 교류에선 더 그랬습니다. 그가 증조모에게 반했을 때는, 차마 말도 못 걸고 그녀의 주위를 반년 동안 맴돌기만 했습니다. 먼저 다가가지 못해서 누군가가 서로를 소개시켜 주길 기다렸죠.
Q: 선생님의 책, 로코솝스키의 회고록에서도 그가 가족에게 보낸 매우 감동적인 편지들이 있었습니다...
A: 맞아요. 그러니 더욱 발렌티나 세로바와의 얘기는 있을 수 없었습니다. 증조부는 매우 잘생겼고, 그녀도 젊고 낭만적인 여인이었으니 그녀가 증조부에게 반했다는 건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듣기로는 세로바가 증조모를 불러내 자신이 증조부를 사랑한다고 말했다고 하던데,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증조부는 치료 중 모스크바 방어에 기여한 공로로 모스크바에 아파트를 받았습니다. 퇴원 후 증조모와 할머니와 함께 며칠을 보내다 군의관 갈리나와 같이 전선으로 떠났습니다. 1945년 1월에 갈리나는 딸을 낳았습니다. 그때 증조부는 제2벨라루스전선군에, 그녀는 제1벨라루스전선군에 있었지만요. 이런 복잡한 관계 속에서 증조부는 두 여자가 만나지 않게 애썼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또 다른 여자를 끌어들인다니, 그랬다면 그는 로코솝스키 원수가 아니라 르젭스키 중위*로 불려야 했을 겁니다. (* 1940년 연극 '옛날 옛적에'에 나오는 방탕하고 저속한 캐릭터.)
Q: 로코솝스키가 지휘한 승전 열병식*과 관련된, 루머가 아닌 흥미롭거나 재밌는 일화가 있을까요?
A: 증조부는 승전 열병식*을 군인 인생에서 가장 큰 상으로 여겼습니다. 열병식 전 자신의 말 폴리우스에 오르면서 부관이었던 클리코프 대령에게 이것이 우리가 수년간 복무한 보상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신거죠. 그리고 게오르기 주코프가 백마를 타고 나왔습니다... (* 1945년 6월 24일 열병식을 말함.)
Q: 주코프가 행진을 주관했죠.
A: 예, 주코프가 스파스카야 탑에서 말을 타고 나왔고, 증조부는 군대를 지휘하며 주코프에게 인계하는 역할이었습니다. 그날 증조부는 흠뻑 젖으셨습니다. 다음날에 열병식 참가자들을 위한 연회가 있었고 모두 열병식 때와 같은 예복을 입어야 했습니다. 그 예복은 몸에 딱 맞춘 단 한 벌밖에 없었고 증조부가 집에 돌아왔을 때 물에 젖어 줄어든 예복이 몸에 딱 붙어 벗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정부 올가 카르포브나가 가위를 가져와 예복의 재봉선을 따라 조심히 잘랐고, 하룻밤 내내 다시 꿰매서 증조부가 무사히 연회에 다시 입고 갈 수 있게 해줬습니다.
Q: 증조부께선 크렘린 벽묘지에 안장되셨죠. 그곳에 가려면 특별한 허가가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
A: 상황에 따라 다르겠죠. 행사가 있는 날엔 쉽게 들어갈 수 없을 겁니다. 사실 전 거기에 혼자 가보려고 시도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여권을 지참하고 제가 누구인지 증명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로코솝스카야라는 이름의 여권을 보여주면 "아, 들어오세요."라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여권만으로는 증명할 수 없으니까요.
사실 증조부는 크렘린 벽에 묻히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병원에서도 "죽음은 두렵지 않지만, 벽에 갇히는 건 두려워."라고 말씀하셨죠. 저희 가족도 그가 아내와 딸과 함께 노보데비치 묘지에 기독교식으로 묻히길 바랬습니다. 삼촌이 이 문제를 법원에 가서 해결하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법적으로 모든 유해는 후손과 상속자에게 속한다고 하지만, 다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모든 유해를 상속자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녔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5월 9일에 묘소가 아닌 동상에 꽃을 놓으러 갑니다.
Q: 마치 로코솝스키가 '국유화'된 것 같네요.
A: 맞습니다. 그는 우리, 심지어 증조모와 할머니에게도 속하지 않게 됐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만약 그가 지금 저흴 보고 있다면 자신의 유해가 전우들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곁에 있길 바라셨을 겁니다. 벽묘지 전우들 중엔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물론 그가 매우 사랑하고 존경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그가 자신과 가장 가깝고 사랑한 사람들 곁에 있고 싶어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Q: 만약 증조부를 만날 수 있다면 그에게 뭘 여쭤보고 싶나요?
A: 저는 그가 그 모든 억압에도 무너지지 않고 스탈린과의 논쟁에서도 옳은 것을 주장하며, 어떻게 이전과 같은 사람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 물어보고 싶습니다.
증조부의 누이 헬레나는 바르샤바가 해방된 후 (안타깝게도 증조부는 제2벨라루스전선군으로 전출되셨고, 바르샤바를 해방한 제1벨라루스전선군은 주코프가 지휘했습니다.) 거리에서 한 소련 군인을 발견하고 그에게 달려가 말했습니다. "그쪽 전선군에서 저희 오빠가 복무하고 있는 거 같아요." 군인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습니다. "저희 군에 폴란드인이 많긴 합니다." 실제로 제1벨라루스와 제2벨라루스전선군엔 두 개의 폴란드 군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저희 오빠는 아주 고위급 장교인 거 같아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전에 '콘스탄틴 로코솝스키가 군대를 이끌고 바르샤바로 오고 있다.'라는 전단이 뿌려진 적이 있었습니다. 군인은 "성이 어떻게 되십니까?"라고 물었고 헬레나는 "로코솝스카야요."라고 답했습니다. 그는 이 여자가 그냥 미친 여자라고 생각했겠지만 혹시 몰라 연락처를 받은 뒤 당국에 전달했습니다.
이 일은 점점 위로 올라가 주코프에게까지 도달했습니다. 주코프는 증조부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습니다. "이봐, 바르샤바에 헬레나라는 누이가 있나?" "그럴 리가... 바르샤바에 헬레나라는 여동생이 있긴 해." "그녀가 자넬 찾고 있어. 주소는 이곳이야." 1945년 1월이었고 그때 증조부는 포메라니아에서 작전 준비를 하고 있느라 바르샤바에 갈 수 없었습니다. 대신 1944년 11월부터 함께 지내고 있던 증조모를 보냈습니다. 증조모가 가서 헬레나를 데려왔고, 그렇게 남매가 다시 만났습니다.
헬레나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오빠가 걸어온 길과 여정을 고려해 그가 어떻게 변했을지 걱정하며 만남에 매우 긴장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썼습니다. "그가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는 여전히 내가 알고 사랑했던 겸손하고 수줍은 미소를 짓는 코스틱이었다." 증조부는 어떻게 여전히 그런 사람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을까요? 제 아버지도 그가 매우 겸손하고 수줍게 미소 짓는 사람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가 그런 억압을 겪고도 어떻게 변하지 않고 그런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는지 매우 궁금합니다. 그리고 명성과 권력이 사람을 변하게 한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는 폴란드 국방장관이었고 폴란드 중앙위원회 위원이었습니다. 체포 같은 비극도, 전쟁도 사람을 변화시키죠. 그런데도 증조부는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정말 흥미롭습니다.
원문: https://dzen.ru/a/Zjy88p50uRIjBjS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