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12

바그라티온 작전에 대한 스탈린과 로코솝스키의 논쟁: 정말로 있었던 일인가?

 원문:  https://www.reddit.com/r/AskHistorians/comments/rr9wmw/rokossovskys_argument_with_stalin_over_bagration/?sort=old 

레딧에 몇 년 전 (2022년 1월) 올라왔던 글을 번역함.  오역 가능성 많음.




최근에 이 동영상을 봤는데 여기서 알렉세이 이사예프가 주장하기를 두 개의 돌파구에 대해 결정한 것은 스타프카였는데 로코솝스키가 자신의 회고록에서 자신의 공이라고 주장했다고 하네요.

이사예프가 맞는 걸까요?


antipenko라는 레딧 사용자의 답글:

이 주제에 대한 가장 포괄적으로 분석한 책을 쓴 미하일 시니친에게 모든 공을 돌립니다. 가능한 경우 원본 문서를 인용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주제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을 위해 먼저 대략적인 배경 지식을 소개합니다. 1944년 봄, 스타프카와 총참모부 장교들, 전선군 사령관들 및 군사위원회들은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알려지게 될 벨라루스에서의 여름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제1벨라루스전선군은 겨울과 1944년 봄에 소련의 성공적인 우크라이나 공세 (그리고 실패한 벨라루스 공세)의 결과로 형성된 "벨라루스 발코니"의 남쪽-남동쪽 면을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데이비드 글랜츠의 Battle for Belorussia는 바그라티온에 이르기까지의 가장 포괄적인 책입니다.

제1벨라루스전선군의 제48군은 1943년 11월 Gomel’-Rechitsa 작전으로 Zhlobin 시 남쪽의 드네프르강을 건너 교두보를 점령했습니다. 이듬해 2월 Rogachev-Zhlobin 작전에서 제3군도 Zhlobin 북쪽의 교두보를 점령했습니다. 한편 전선의 좌익은 Pripyat’ 강을 따라 늪지대로 진격하여 Parichi 마을 맞은편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전선을 점령했습니다.

로코솝스키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자신이 맡은 부분을 계획하면서 전선군 군사위원회와 함께 독일군 제9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단일 또는 동심원 공격 대신 두 개의 주 타격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는 제3군의 교두보에서 Bobruisk를 향해 공격한 후 Minsk까지 계속 공격하고, 다른 하나는 Parichi 지역을 거쳐 Slutsk를 향해 공격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로코솝스키가 스탈린과 총참모부에 자신의 계획을 발표했을 때, 그는 당시 있었던 일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1):

마침내 5월 22일과 23일에 본부에서 공격 계획이 수립되었다. Lublin  방향으로 펼치는 전선의 좌익 군대의 공세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승인되었지만 우익의 두 개의 타격에 대한 결정은 비판을 받았다. 최고사령관과 그 대리인들은 제3군이 점령하고 있는 드네프르 (Rogachev 지역)의 교두보로부터 하나의 주 타격을 가할 것을 주장했다. 나는 옆 방으로 가서 스타프카의 제안을 생각해 보라는 요청을 두 번 받았다.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새롭게 열성적으로 내 결정을 옹호해야 했다. 내가 우리의 관점을 확고히 주장하자 스탈린은 우리가 제출한 대로 작전 계획을 승인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전선군 사령관이 굴하지 않는다는 것은 신중하게 계획하여 공세를 조직했다는 증거겠지. 그리고 그건 성공에 대한 믿을 수 있는 보장이고."

A.V. 이사예프는 저명한 러시아 군사 역사가입니다. 그의 2014년 저서 Операция "Багратион". "Сталинский блицкриг" в Белоруссии 에서 그는 여러 문서와 주코프의 회고록을 인용하여 로코솝스키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총참모부는 5월 22~23일 회의 전에 이미 전선군 사령관과의 논의에서 두 개의 타격을 결정했으며, 로코솝스키는 회고록에서 이를 과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로코솝스키가 모스크바에 도착해 자신의 주장을 제시하기 전인 5월 20일에 이미 로코솝스키와 비슷한 계획을 스탈린이 승인했다는 것입니다! (2) 주코프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


5월 22 일, 최고사령관은 나의 동석하에 A.M. 바실렙스키, A.I. 안토노프, K.K. 로코솝스키, 그리고 5월 23 일 I.Kh. 바그라먄과 I.D. 체르냐홉스키를 맞이했다. 다가오는 작전에 대해 총참모부로부터 정보를 받은 전선군 사령관들은 부대를 위한 작전 계획 초안을 가지고 본부에 도착했다 …

제1벨라루스전선군 병력에 의한 벨라루스 방향의 "두 개의 주 타격"을 K.K. 로코솝스키가 최고사령관 앞에서 주장했다는 설이 군 일각에서 회자되고 있는데, 이는 사실무근이다. 전선이 계획한 이 두 개의 타격은 총참모부 계획에 따라 5월 20일, 즉 제1벨라루스전선군 사령관이 본부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I.V. 스탈린의 승인을 받았다.

소련 군사 이론은 한 전선에서 두 개의 주 타격을 규정한 적이 없으며 두 타격의 강도와 중요성이 동일하다면 일반적으로 "강력한 타격"이라고 불렸다는 점을 여기서 지적해도 될 것이다. 작전 전략 용어의 혼선을 피하기 위해 이 점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 이사예프는 1944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가는 문서에 따르면 제3군 교두보로부터의 하나의 주 공격을 주장하고 Parichi 지역에서는 보조 공격만을 주장한 것이 전선군 사령관 로코솝스키 본인이었다고 주장합니다. 로코솝스키의 말은 사실이 아닐 뿐만 아니라 어느 쪽이 무엇을 지지했는지도 뒤집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사예프는 아마도 로코솝스키가 자신의 하나의 타격 계획을 재고하라는 요청을 받았고, 결국 총참모부의 계획에 동의하게 된 것 같다고 주장합니다! (4)

진실은 무엇일까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두 가지 버전이 있습니다:

1: 로코솝스키의 버전에서는 로코솝스키와 전선군 군사위원회가 두 개의 타격에 대한 작전 구상을 수립했고, 스탈린과 총참모부의 반대에 직면했지만 결국 이 아이디어를 설득했습니다.

2: 주코프의 버전에서는 총참모부가 로코솝스키와 협력하여 계획을 수립했고, 작전을 논의하기 위해 로코솝스키가 모스크바에 도착하기 전에 스탈린은 이를 승인했습니다.

이 때 있었던 일에 대한 제1발트전선군 사령관 바그라먄의 세 번째 진술로 인해 혼란은 가중됩니다: (5)

그리고 5월 22일, 나는 D.S. 레오노프 장군과 함께 다시 모스크바로 호출되었다. 우리는 스탈린에게 보고하기 위해 다가오는 공격 작전의 구상과 계획을 알 수 있도록 총참모부에 소집되었다.

제1벨라루스전선군 사령관 K.K. 로코솝스키가 이미 A.I. 안토노프의 사무실에 와 있었다. 우리 둘 다 서로 만나서 매우 기뻤고, 전선 상황에 대해 몹시 흥분하면서 서로 질문을 했다.

본론으로 접어들면서,  A. I. 안토노프 장군은 우리를 맞이할 준비가 된 G. K. 주코프와 A. M. 바실렙스키가 계획된 작전에서 각 전선의 군대 참여와 관련된 모든 질문에 대해 우리와 돌아가며 논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다음 날인 5월 23일, 본부에서 제한적인 회의가 열렸다. 최고사령관 I.V. 스탈린 외에도 G.K. 주코프, A.M. 바실렙스키, A.I. 안토노프, K.K. 로코솝스키, D.S. 레오노프가 참석했다…

마지막으로 발언한 사람은 K. K. 로코솝스키였다. 한 구역에서만 전선 병력이 강력한 타격으로 돌파한다는 총참모부의 제안과는 달리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가 적의 방어를 두 구역에서 돌파하여 포위하고 적의 방어 깊숙한 곳에서 후속 공세로 주 집단을 패퇴시킬 두 개의 충격 집단을 만들어야 한다고 아주 합리적으로 결론을 내렸던 것을 나는 잘 기억하고 있다. 사령관의 이 제안은 G.K. 주코프와 A.M. 바실렙스키가 단호한 지지를 받았고 최고사령관 I.V. 스탈린의 승인을 받았다.

내가 보기에 최고사령관은 K. K. 로코솝스키 대장에게 각별한 호의를 보이는 것 같았다. S.K. 티모셴코는 I.V. 스탈린이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를 F.E. 제르진스키와 비교했다고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둘은 똑같다"며 "정직하고, 총명하고, 친절하고, 인간적인데, 다만 펠릭스가 조금 더 단호하고 엄격할 뿐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3: 바그라먄의 버전에서는 로코솝스키가 총참모부 및 스탈린과 의견이 달랐지만 그의 제안이 논란 없이 받아들여졌다고 합니다.

논의할 버전이 몇 가지 더 있지만, 논의를 더 진행하기에 앞서 먼저 한 발짝 물러서서 이 회의에 이르게 된 계획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출처:

(1) – K.K. Rokossovsky, Солдатский долг page 252.

(2) – A.V. Isaev, Операция "Багратион". "Сталинский блицкриг" в Белоруссии, pages 164-173.

(3) – G.K. Zhukov, Воспоминания и размышления, page 222.

(4) – Isaev, 171-172.

(5) – Bagramyan, Так шли мы к победе, page 301.


첫 번째로 주목할 문서는 이사예프도 언급한 것으로, 1944년 3월 4일자 제1벨라루스전선군의 향후 가능한 작전 방향에 대한 평가입니다: (6)

(1) Chausy-Mogilev. 이 방향의 공격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불리하다:

a) 상대 적을 물리치고 드네프르강으로 돌파하는 제한된 목적으로 실시될 수 있다. 작전을 더 발전시키려면 드네프르강을 도하해야 하며, 이는 이 방향으로 성과를 확대하는 것을 복잡하게 만든다;

b) 이 방향으로 공격하려면 현재 이미 드네프르강 서쪽 강둑에 위치하고 있는 제50군과 제3군을 약화시키면서 강력한 하나의 집단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동일한 전력과 장비를 강 서쪽 강둑에서 옮겨 배치하는 것은 이익이 없으므로 적절하지 않다.

(2) Bykhov-Mogilev. 이 방향 역시 다음과 같은 이유로 공세에 불리하다:

a) 대부분 숲이 우거지고 지형이 매우 거친 곳으로 적이 소규모 병력으로 특히 강력하고 깊은 방어를 구축할 수 있다;

b) 이 방어를 극복하려면 대규모 보병과 포병 병력을 투입해야 하고 탄약이 많이 소모되어야 한다. 이 방향으로 공세 작전을 펼친다면 전투가 장기화될 것이고 인력, 장비 및 물자 손실 측면에서 비용이 많이 들며 결정적인 결과를 얻지 못할 수도 있다.

(3) Mormal 지역으로부터 Bobruisk까지의 보조 타격을 동반한  Rogachev-Bobruisk. 이 방향이 가장 유리하다.

a) 이 지형에서는 모든 유형의 병력을 사용할 수 있다;

b) 이 방향으로 공격을 조직하려면 이미 전선의 주요 병력과 자산이 Rogachev 북쪽의 드네프르 서쪽 강둑과 모르말 근처의 드네프르와 베레지나 사이에 있기 때문에 복잡한 재편성을 할 필요가 없다.

(4) Parichi-Bobruisk. 이 방향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불리하다:

a) 이 방향으로 공격하려면 제3군과 제48군의 중심부를 약화시켜 하나의 강력한 집단을 만들어야 한다;

b) 적이 중심부의 약화를 이용해 아군을 드네프르강 너머로 몰아넣을 목적으로 공세를 펼칠 수 있으므로 중심부를 약화시키는 것은 위험하며 따라서 비현실적이다.

따라서 네 가지 가능한 방향 중 로가초프 방향이 Bobruisk를 공격하는 데 가장 유리하다.

이 계획에서 로코솝스키는 제3군의 교두보로부터 공격하고, 제48군의 교두보로부터 이차적인 공격을 하여 베레지나 강을 따라 제9군의 방어를 무너뜨리고 Zhlobin을 포위할 가능성을 지지했습니다. 그는 Parichi 방향에서의 공격은 최선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기각했습니다.

그러나 로코솝스키가 기각한 이유는 제3군과 제48군의 병력을 재편성하면 전선의 드네프르 교두보가 심각하게 약화될 것이라는 점 때문이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병력 부족이었습니다. 바그라티온 작전이 시작될 무렵 로코솝스키는 전차 군단과 기계화 군단, 기병 군단, 제28군을 추가로 받았지만, 3월 Bobruisk 방향에 대한 그의 선택지를 제한했던 상황이 5~6월에는 크게 달라졌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4월에는 훨씬 더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당시 코벨과 서부 Pripyat’ 늪지대를 상대로 작전을 수행하던 제2라루스전선군은 시의 방어선을 약화시키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1944년 3월 로코솝스키가 스탈린을 만나 향후 작전을 논의했을 때, 로코솝스키는 제1벨라루스전선군과 제2벨라루스전선군을 통합하여 그의 지휘권이 "벨라루스 발코니"의 남쪽 측면 전체를 관할하도록 하는 아이디어를 지지했습니다. 4월에 스탈린은 이 평가에 동의하고 두 전선의 통합을 명령했습니다. (7)

3월 4일의 평가로부터 한 달 후, 제1벨라루스전선군의 전력, 담당할 수 있는 전선, 전략적 가능성은 두 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벨라루스에 있는 중부집단군의 방어선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대신 포위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로코솝스키는 자신의 전선의 좌익으로 관심을 돌렸습니다. 이제 그의 주 타격은 Brest 쪽을 향하게 되어 독일군의 방어선을 측면에서 공격하여 퇴로를 차단한 다음, 공격의 제2단계에서만 Bobruisk 방면으로 공격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총참모부는 그의 생각에 긍정적으로 반응했지만,  두 가지 중요한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 전선 좌익 반대편에 있는 독일군의 강력한 병력, 그리고 1~2개 전차군을 포함한 상당한 증원이 필요하다는 로코솝스키의 요청이 그것이었습니다. (8) 로코솝스키는 4월 24일~26일에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총참모부에게 이 계획을 발표했습니다.(9)

한편, 4월 동안 스탈린과 총참모부는 하계 공세를 위한 구상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여기에는 벨라루스에서의 공세, 핀란드에 대한 공세, 우크라이나 서부를 통과해 Lviv를 점령하는 작전이 포함되었습니다. 이 한 달 동안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공세는 루마니아와 전쟁 전 폴란드 국경을 넘어 극적인 결말을 맺었습니다. 붉은 군대의 춘계 공세가 힘을 잃자 스탈린은 공세 작전을 일시적으로 중단해야 한다는 것을 마지못해 납득하고 4월 중순에 먼저 서부와 북서부 방면에 방어로 전환할 것을 명령한 후 5월에 루마니아의 전선에 방어로 전환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10)

벨라루스 공세에 대한 최종 결정은 4월 하반기에 내려졌습니다. (11) 로코솝스키의 좌익 공격에 대한 제안은 좋은 아이디어였지만 이를 뒷받침할 자원이 부족했습니다. 대부분의 전차 부대는 우크라이나 서부와 루마니아에 남아 있었습니다 - 최종적으로는 제1벨라루스전선군의 좌익을 강화하게 되는 제2전차군은 6월까지 루마니아에 남아있었습니다. (12) 이 시점까지 세웠던 로코솝스키의 계획은 5월 초에는 완전히 다시 시작해야 했고, 이제 다시 한 번 Bobruisk를 상대로 우익의 공격에 집중해야 했습니다.

전선군의 이전 계획으로 돌아가서 로코솝스키는 5월 4일 고멜에서 전선군 군사위원회와 군 지휘관들을 소집하여 Bobruisk에 대한 공격을 논의했습니다. (13) 논의된 구상은 유사한 상태로 유지되었습니다 -  제3군의 교두보로부터 주 공세를 펼치고, 제48군이 베레지나 동쪽 강둑을 따라 보조 공격을 펼쳐서 Bobruisk 주변의 독일군을 포위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논의 끝에 제65군도 Parichi 축의 베레지나 서쪽 강둑을 공격하여 최종적으로 작전 제2단계에서 공세를 확대하는 더 큰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전선군의 계획 수립 회의에서 제48군 사령관은 자신의 부대가 어려운 지형과 강력한 적의 방어에 직면해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14) 제3군과 제48군의 합동 공격에 대한 이러한 의구심은 5월 내내 전선군의 계획 수립에 계속 영향을 미쳤습니다.

로코솝스키는 5월 12일 스타프카에 새로운 제안서를 제출했습니다: (15)

(2) 공세 작전의 목표는 적의 Zhlobin 집단과 전선 우익의 주 병력을 분쇄하는 것이다.…

작전 종심에서 작전을 지원할 수 있는 능력의 존재에 따라, 해당 방향으로 성과를 발전시킨다.

a) 주 타격 - Bobruisk, Osipovichi, Minsk;

b) 보조 타격 - Parichi, Slutsk, Baranovichi.

(3) 기간 - 작전에는 7일이 소요될 것이다.

이 공격 계획의 밑그림은 여기에 있습니다. 로코솝스키는 Bobruisk에 대한 제2단계의 주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제28군과 제9전차군단을 제1단계 공격 후 스타프카의 예비대에서 해제하여 제3군과 제48군 사이에서 공격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5월 12일까지 계획은 제48군과 제3군이 Zhlobin에서 Bobruisk를 향해 집중 공격한 후 주 방향과 보조 방향에서 더 광범위하게 전과를 확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출처:

(6) – Central Archive of the Ministry of Defense of the Russian Federation (Hereafter TsAMO RF), F. 233, Op. 2356, D. 256, pages 214-215.

(7) – M.V. Sinitsyn, * Операция «Багратион». «Оба удара главные...». К 75-летию операции*, page 120.

(8) - S.M. Shtemenko, Генеральный штаб в годы войны, page 175.

(9) – На приеме у Сталина. Тетради (журналы) записей лиц, принятых И.В. Сталиным (1924—1953 гг.), page 431, and TsAMO RF, F. 233, Op. 2356, D. 33, page 1.

(10) – Shtemenko, 174-175.

(11) – Shtemenko, 175, and Zhukov, 220.

(12) – Shtemenko, 175-176, and TsAMO RF, F. 307, Op. 4148, D. 1, pages 137-156.

(13) – TsAMO RF, F. 233, Op. 2356, D. 256, page 4.

(14) – Sinitsyn, 128-129, and TsAMO RF, F. 233, Op. 2356, D. 256, page 3.

(15) – TsAMO RF, F. 233, Op. 2356, D. 256, page 217.


그 후 총참모부가 전체 작전 개요를 작성하고 스타프카의 A.I. 안토노프가 서명하여 20일에 스탈린에게 제출했습니다: (16)

... 제1벨라루스 전선군 (제3, 48, 65군: 소총 사단-29, 전차 군단-1, 기계화 군단-1, 포병 침투 군단-2, 근위 박격포 사단-1).

(5) 전선군의 임무

… 제1벨라루스전선군은 Rogachev 북쪽과 Mormal 전선, Ozarichi의 두 지역에서 적의 방어를 뚫고 전반적인 Bobruisk 방향으로 공격한다. 또한 남쪽에서 Minsk를 우회하여 일부 병력을 Slutsk에 투입하여 공세를 전개한다.

제1단계에서는 Bobruisk 지역을 점령한다.

제2단계에서는 - Minsk, Stolbtsy, Starobino 전선으로 발전시킨다.

(6) 예비대.

… Gomel 지역 - 제28군 A 및 제2근위군. A

(7) 작전 개시 -1944년  6월 15~20일

이 계획은 로코솝스키의 제안과 매우 흡사합니다 - 제48군과 제3군의 공세로 Zhlobin을 포위하고 Bobruisk를 공격하고, 베레지나 서쪽의 넓은 전선에서 제65군의 지원 공격을 받는 것입니다. 추가적인 기계화 군단 및 전차 군단의 지원이 있지만 제28군은 여전히 예비대로 유지됩니다. 20일 제출된 총참모부 계획은 최종 구상은 아닙니다 - 실제 투입된 병력보다 적은 병력을 포함하고 있으며, 공격 내용은 5월 12일 계획과 거의 동일합니다.

위에서 설명한 회의 이전에는 스타프카와 제1벨라루스전선군 모두 최종적으로 실시한 것과 유사한 계획을 수립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실렙스키가 회고록에서 언급했듯이 스탈린과 스타프카는 여전히 그 다음 며칠 동안 모스크바에서 전선군 사령관들을 만나 그들의 발표를 들을 계획이었고, 그 후 총참모부가 최종 수정 계획을 제출해 스탈린의 승인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17) 주코프의 주장과는 달리, 모스크바에서 해당 회의가 열리기 전에는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었습니다.

제1벨라루스전선군의 파일에는 5월 24일 로코솝스키가 서명한 Bobruisk에 대한 전선군의 우익 공세에 대한 지도와 제1벨라루스전선군의 작전부장 보이코프가 "5월 22~23일 전선군 지휘소로부터 총참모부로 이동할 때" 작성한 전선군의 좌익 공격안에 대한 지도가 있습니다. (18) 전선군의 전쟁 일지에 따르면 로코솝스키와 보이코프가 22~23일 모스크바에서 총참모부 작전국장과의 회의에 참석했음이 확인됩니다. (19) 따라서 두 지도 모두 모스크바 출장 전과 출장 중에 동시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5월 24일 지도는 몇 군데 분명히 편집되었습니다. 제48군의 공격이 그려졌다가 지워졌습니다. Parichi를 통한 공격에 추가적인 기계화 부대가 포함되었습니다. 좌익에 의한 Bobruisk 포위는 편집하여 삭제되고 그 주변의 전반적인 진군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최종 구상은 바그라티온 작전에 사용된 제1벨라루스전선군의 최종 공격 계획에 가장 근접한 것입니다. 두 개의 주 타격을 가하는 것입니다 - Bobruisk를 향한 오른쪽의 제3군, Parichi를 통과하는 제65군 및 새로 배치된 제28군. 제48군의 공격은 로코솝스키가 5월 어느 날 전선의 해당 구역을 방문했을 때 지형이 얼마나 늪지대인지 주목한 것에 영향을 받아 완전히 삭제되었습니다 (20).

로코솝스키가 22~23일 총참모부 작전국장 시테멘코에게 제시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가져온 지도상의 작전은 안토노프가 20일 스탈린에게 제출한 계획과 상당히 달랐습니다.

주코프, 로코솝스키, 바그라먄이 모두 회고록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스탈린과의 회의도 23일에 이루어졌을까요? 아마도 아닐 겁니다!

로코솝스키가 이 시기에 모스크바에 있었다는 것은 알려져 있지만, 제1발트전선군의 전투 보고서에 따르면 바그라먄은 없었습니다 (21). 이름이 알려진 또 한 명의 참가자인 제3벨라루스전선군 사령관 체르냐홉스키도 없었습니다 - 그는 25일까지 아팠고 25일에야 모스크바에 도착했습니다 (22). 스탈린의 회의록에도 아무것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23) 시니친은 날짜의 혼동에 대해 그럴듯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출판된 주코프의 회고록에 잘못된 날짜가 기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교열 담당자는 자신도 모른 채 잘못된 날짜를 기준으로 사용하여 날짜가 일치하도록 후속 회고록들을 "정정"했다는 것입니다. (24) 아마도 로코솝스키와 그의 참모는 며칠 후에 있을 스탈린과의 "중대 회의"를 준비하기 위해 22~23일에 총참모부와 소규모 회의를 가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제 우리 앞에는 로코솝스키가 스탈린을 만나기 전에 작성한, 바그라티온 작전의 최종 구상과 흡사하고 총참모부의 제안과는 매우 다른 계획이 있습니다. 24일에는 5월 20일의 제안에 따라 전차와 기계화 군단이 제1벨라루스전선군에 파견되었습니다. (25) 그러나 새로운 계획이 요청한 다른 병력은 제공되지 않았습니다. 스탈린과의 회의가 23일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언제 이루어졌을까요? 문서에 남아 있는 서명 (또는 서명의 부재)을 보면 24/25~27일에 모든 전선군 사령관들이 모스크바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스탈린의 회의 일지에는 26일 밤 21:00~1:30에 다음과 같은 참석자들과 함께 회의가 열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6)

몰로토프 21:00-02:30

보로실로프 21:00-01:30

베리야 21:00-01:30

말렌코프 21:00-01:30

주코프 21:00-01:30

바실렙스키 21:00-01:30

안토노프 21:00-01:30

시테멘코 21:00-01:30

로코솝스키 21:00-01:30

불가닌 21:00-01:30

체르냐홉스키 21:00-01:30

마카로프 21:00-01:30

바그라먄 21:00-01:30

레오노프 21:00-01:30

페트로프 21:00-01:30

메흘리스 21:00-01:30

보로노프 21:45-00:30

야코블레프 GAU 21:45-00:30

크룰레프 23:10-23:20

노비코프 23:20-00:30

페도렌코 23:45-00:30

보로비예프 00:20-00:30

크룰레프 00:45-01:30

보로노프 00:50-01:30

노비코프 00:50-01:30

야코블레프 00:50-01:30

보로비예프 00:50-01:30

드라체프 00:50-01:30

콜레소프 00:50-01:30

아긴스키 00:55-01:30

미코얀 02:30-02:30

참석자들의 회고록에서 언급되는 모든 주요 인물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주목할 만한 것은 몰로토프와 말렌코프의 존재인데, 로코솝스키는 이 회의에 대한 인터뷰에서 그가 스탈린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회의장을 나가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이들이 그를 질책했다고 말합니다: (27)

스탈린은 옆 방으로 가서 스타프카의 제안을 숙고하고 그에 따라 내 결정을 보고하라고 두 번 요구했다. 두 번째에는 몰로토프와 말렌코프가 옆 방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내가 최고사령관과 논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탐탁찮아 했고 나에게 스타프카의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내가 옳다고 확신하며 스타프카가 하나의 타격을 명령한다면 나를 전선군 지휘에서 배제해달라고 요청하겠다고 대답했다.

따라서, 총참모부가 5월 20일 승인한 계획과는 상당히 다르지만 바그라티온 작전의 최종 계획과 매우 유사한 계획을 로코솝스키가 수립한 지 며칠 후인 1944년 5월 26일 밤에 회의가 열렸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회의 참석자들 모두는 회고록 저자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일치합니다.

로코솝스키는 자신의 계획에 대해 스탈린과 논쟁을 벌였지만 결국 자신이 옳다는 것을 스탈린에게 납득시켰다고 주장합니다. 주코프는 로코솝스키가 부정확하고 스타프카가 이미 이 계획을 수립했었다고 주장합니다 - 그러나 증거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그라먄은 로코솝스키가 회의에서 새로운 계획을 제시했지만 스탈린과 스타프카가 논쟁 없이 이를 받아들였다고 주장합니다.

출처:

(16) - Русский архив: Вели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Генеральный штаб в годы Великой Отечественной войны. Документы и материалы. 1944– 1945 гг. Т. 23 (12–4), pages 205–206.

(17) A.M. Vasilevskiy, * Дело всей жизни*, page 402.

(18) TsAMO RF, F. 233, Op. 2356, D. 36, page 1, and TsAMO RF, F. 233, Op. 2356, D. 35, page 1.

(19) Ibid., F. 233, Op. 2356, D. 256, page 5.

(20) Rokossovsky, 251.

(21) TsAMO RF, F. 235, Op. 2074, D. 119, page 1.

(22) Shtemenko, 177 and Bagramyan, 299-300.

(23) На приеме у Сталина, 433.

(24) Sinitsyn, 164.

(25) Ibid., 162.

(26) На приеме у Сталина, 433.

(27) Sinitsyn, 159.


이 회의에 대한 다른 이야기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많은 참석자들은 이 일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바실렙스키는 1965년 인터뷰에서 이 논쟁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주코프의 견해를 되풀이하며 논쟁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했습니다 (28). (또한 주코프와 친분이 두터웠던) 전선군 군사위원회 위원 K.F. 텔레긴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로코솝스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29)

하계 공세에 대한 최종 계획의 고려 및 승인, 우리 전선군 부대의 참여와 관련하여 있었던 일에 대해 현재 존재하는 해석을 분석하고 비교하려는 것은 아니고, 다만 모스크바에서 전선으로 돌아온 K. K. 로코솝스키가 해 준 이야기를 재현해 보겠다. 이 이야기는 기억에 의한 것이지만 전쟁이 끝난 직후에 기록되었다. 나는 K. K. 로코솝스키와의 개인적인 연락을 통해 (기록하는 동안) 여러 부분을 확인했다:

"우리의 제안을 먼저 검토했지."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는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스탈린이 나를 향해 이렇게 말했네. "우리는 이미 자네의 계획을 잘 알고 있네. 그리고 여기 참석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계획에 찬성하지 않소. 그들은 오른쪽 측면에 두 개의 주 타격을 가하려는 자네의 계획이 군사 과학의 통념에 어긋난다고 주장하고 있네. 자네의 의견을 고집하겠나?"

나는 우리 선택의 타당성을 분명히 했네. 그런 다음 스탈린은 참석한 사람들을 향하여 그들의 의견을 말하도록 했어. 솔직히 이 부분에서 힘겨웠지: 총참모부 대표와 스타프카 위원들은 거의 만장일치로 내가 무식하고, 작전에 대한 사고가 성숙하지 못하고, 고려할 가치가 있는 계획을 수립할 능력이 전반적으로 결여되었다고 비난했네. "하나의 작전 방향으로 두 개의 주 타격을 실시하는 것을 어디서 본 적이 있나? 군대를 약화시켜 공격하는 것이고 병력이 분산되고 작전 자체의 성공이 의도적으로 위협받게 되는데?"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고.

우리 제안에 대한 모든 비판을 듣고 나서 스탈린은 다시 나를 향해 질문을 던졌네: 내가 내 계획을 계속 주장하겠느냐고? 나는 우리의 계획이 존재하는 모든 상황과 예상되는 결과를 고려하여 종합적으로 수립되었으므로 주장을 고수하겠노라고, 전선군의 전체 지도부가 글자 그대로 전선 전체를 포복으로 다니고 있다고 대답했네 - 다른 사람이 쓴 보고서로 상황을 파악한다는 것은 내게 익숙지 않은 일이니까.  계획에는 까다롭고 매우 습한 지형에서 공세를 펼치기 위한 총체적으로 숙고한 효율적인 병력 사용이 포함되어 있었지. 그리고 나는 또한 우리가 제안한 결정에 전선군 사령부뿐만 아니라 야전군 지휘관, 많은 부대 지휘관들의 종합적 의견이 포함되어 있음을 최고사령관에게 보고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네.

나의 발언을 두고 새로운 비판이 빗발쳤네. 심지어 누군가는 군의 권위를 들먹이며 내게 합리적이 되라고 요구하기도 했지. 군사사의 몇 가지 예가 나왔고... 스탈린은 오가는 말을 경청하며 파이프를 피웠고 때때로 공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 보였네.

이 모든 비난을 듣고 나서 내가 군의 권위를 전적으로 존중하지만 계속해서 내 입장을 고수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스탈린은 명백한 짜증의 기미를 보였네. "자네는 고집쟁이로군! - 그는 비난조로 말했어. -옆 방으로 가서 다시 생각해 보게! "

나는 나왔고 한적한 방의 적막 속에 앉아서 생각을 했네. 하지만 내가 다른 어떤 생각을 해야 한단 말인가? 결국 우리는 모든 면에서 실패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확고한 자세로, 우리가 여기에서 평가하고, 재고하고, 다듬어온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머릿속에 되짚으며 다시금 결정을 내렸지 - 끝까지 우리의 입장을 고수하기로 말이야!

약 20분 후 나는 최고사령관의 집무실로 호출되었네. 내가 들어서자마자 스탈린은 사람들에게 대화를 끝내라는 신호를 보내며 물었어: "자, 마음이 바뀌었나?" "아니요." 내가 말했네. "스탈린 동지. 우리의 결정은 확고하고 변함이 없으며, 제출한 대로 승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그게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제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유능한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것이므로, 저를 전선군 사령관에서 해임해 주십시오. 저 개인과 전선군 군사위원회는 다른 결정을 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집무실에 긴장된 침묵이 흐르고 누군가는 내가 집무실에서 이미 쫓겨나기라도 한 듯이 안쓰럽게 한숨을 쉬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모든 게 지금 결정될 것이고, 물론 이 상황이 내게는 최고의 상황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깨달았네. 또한 다른 누군가가 우리의 결정 쪽으로 돌아서거나 그렇지 않으면 작전에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나는 나의 확신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었네.

"됐소, 로코솝스키 동무." 그 순간 스탈린이 이번에는 짜증 없이 차분하게 말했네. "가서 다시 생각해 보게. 신중하게 생각하게!" 

나는 이미 모든 세부 사항을 검토해냈던 옆 방으로 다시 나갔네. 그리고 이상하게도 갑자기 내가 옳다는 자신감이 충만해져서, 호출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최고사령관의 집무실로 돌아갔네. 이제는 최고사령관이 일종의 강한 흥미와 호기심으로 나를 바라 보는 것 같았네. 나는 나름대로 이를 해석하고 아무리 잘해야 나는 다시 야전군 하나를 지휘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지. "자, 어떻게 결정했나?" 스탈린이 물었네.

여기서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는 잠시 침묵했고, 일어났던 일을 되새기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 다음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우리의 결정을 고수하겠다고, 나는 다른 길을 찾을 수 없으며, 전선의 작전 성공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 있는 한 내 입장을 견지하겠다고 말했네!"

그 순간에서야 나는 집무실이 덥다는 느낌이 들었네. 스탈린은 호기심을 숨기지 않고 나를 살폈네. 그리고는 자신의 말을 강조하듯 파이프를 허공에 흔들며 말했지: "내가 좋아하는 것이 이거지! 사람이 자신이 옳다는 확고한 내적 신념을 갖고 있고, 상황과 전선의 능력 양쪽 모두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고, 성공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 ... 우리 군 지도자 중 일부는 그렇지 못 하지. "이렇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라고 말하면 찬성하고, "저렇게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라고 말하면 또 다시 즉시 찬성하는 사람들. 그렇게 되면 그런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게 돼. 스스로 뭔가, 어떤 종류의 신념, 자신의 의견이 있기는 한 것인지? 그러한 지도자에게서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어. 지휘관은 자신의 유일한 결정이 옳다는 것을 확신하고 그것을 옹호할 수 있어야 해. 로코솝스키의 행동은 이에 대한 좋은 예시야! "그리고 나서 스탈린은 나를 향해 말했네: "자네의 계획을 승인하네. 성공을 기원하지! "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반응했나요?" - 그리고 나는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에게 물었다.

아마도 내 군 복무 기간을 통틀어 처음으로 옷깃의 단추를 풀고 싶었지! - K. K. 로코솝스키가 웃으며 말했다.

이 기억할 만한 대화와 관련하여, 최종 결정권은 전쟁 내내 그랬던 것처럼 항상 스타프카에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권은 반드시 군대 지휘관, 전선군과 야전군의 군사위원회, 많은 부대의 지휘관 및 사령부의 집단적 지혜라고 불릴 만한 것을 흡수하고 자주 반영했다.

전선군 군사위원회와 야전군의 다른 구성원들도 회고록에서 비슷한 버전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30) 어쩌면 로코솝스키가 자신을 돋보이려고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팀 전체가 믿었던 이야기인 것은 분명합니다. 저는 로코솝스키가 명예욕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치부되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회의가 끝난 후 제28군은 5월 27일 새벽 3시 30분에 제1벨라루스전선군으로 즉시 파견되었습니다. 26일 밤에 무슨 얘기가 오갔든 간에 로코솝스키는 원하는 병력을 확보한 셈이었습니다. 며칠 후 전차 군단, 전투기 및 폭격기 사단 그리고 기병 군단이 추가로 파견되었습니다. (31) 5월 31일, 스타프카는 제1벨라루스전선군에 바그라티온 작전에 대한 최종 명령서를 보냈습니다: (32)

최고사령부 스타프카의 명령서:

(1) 두 개의 타격을 가하여, 적의 Bobruisk 집단을 격파하고 주 병력으로 Osipovichi-Pukhovichi-Slutsk 방향으로 진격하여 적의 방어를 돌파하기 위한  작전을 준비 및 실행할 것: 하나는 Rogachev 지역의 제3군과 제48군 병력이 전반적인 Bobruisk-Osipovichi 방향으로, 다른 하나는 베레지나 하류-오자리치 지역의 제65군과 제28군 병력이 전반적인 Pirogi-Slutsk 방향으로.

당면 과제는 적의  Bobruisk 집단을 분쇄하여 Bobruisk-Glusha-Glusk를 점령하고 우익의 일부 병력은 제2벨라루스전선군의 Mogilev 집단 격파를 지원하는 것임. Pukhovichi-Slutsk-Osipovichi 지역으로 진격하는 것을 목표로 공세를 계속 전개할 것.

(2) 돌파 후 기동 부대 (기병, 전차)를 투입하여 공세를 더욱 발전시킬 것.

(3) 1944년 6월 10일 24:00부터 제1벨라루스전선군과 제2벨라루스전선군 사이의 경계선은 다음과 같이 설정함: Chigirinka까지 그리고 더 나아가 Svisloch-Pukhovichi까지 (모든 지점은 제1벨라루스전선군에 포함됨).

(4) 제2벨라루스전선군과의 조율 유지를 위한 책임은 제1벨라루스전선군 사령관에게 부여.

(5) 준비 기간 및 공세 개시 - 주코프 원수의 지시에 따를 것.

계획에 약간의 조정이 있었지만, 로코솝스키의 최종 제안과 거의 흡사했습니다.

출처:

(28) Ibid., 167.

(29) K.F. Telegin, * Войны несчитанные вёрсты*, pages 294-297.

(30) Sinitsyn, 178.

(31) Ibid., 162.

(32) Русский архив: Вели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Т. 16(5-4). Ставка ВГК, 1944-1945 гг.: Док. и материалы, page 94.


그렇다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주코프와 바실렙스키는 왜 로코솝스키와 일치하지 않았을까요? 바그라먄의 주장대로 그들이 로코솝스키의 제안에 즉시 동의했다면, 그런 일이 전혀 없었다고 부인하는 것이 이상해 보입니다.

특히 주코프는 공세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이 계획을 비하했습니다. 그는 제3군과 제48군의 공세가 제28군과 제65군의 측면을 늪에서 구출해야 할 것이라고 놀렸습니다. (33) 나중에 주코프와 함께 복무했고 그를 매우 존경했던 병참 담당 장군 N.A. 안티펜코도 주코프가 좌익을 믿지 않았다고 언급했습니다. (34) 주코프가 처음부터 로코솝스키의 계획에 동의했다는 바그라먄의 주장은 다른 당사자들의 회고록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주코프는 로코솝스키의 이야기를 매우 개인적으로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로코솝스키가 처음으로 이 이야기를 한 후, 1965년에 주코프는 로코솝스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5)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Literaturnaya Gazeta 기자와 나눈 자네의  인터뷰를 매우 주의 깊게 읽었네.

인터뷰의 도입 부분은 매우 만족스러운 인상을 주었어.

실제로, 많은 군사 작가, 장성과 원수가 대조국전쟁의 역사를 왜곡하여 때로는 실제 역사에서 전반적인 배경, 도표, 골격만 남아 있고 내용을 너무 "지어내서" 언제 어디서 있었던 일인지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 ...

알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자네를 매우 존경하며 대했고 "친구가 곤경에 처했을 때" 진심을 반복해서 표현해 왔어.

하지만 지금은 그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닐세.

나는 출판되는 자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따라가고 있네 (자네가 편집 책임을 맡아 출판된 스탈린그라드에 관한 책은 유감스럽게도 아직 읽지 못했네). 그리고 나는 항상 자네가 작전의 역사에 대해 진실하게 진술할 거라고 기대하네. 그러나 아아! 자네,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는 역사의 거울 앞에서 추파를 던지고 싶은 욕망, 다소간의 자기 개인의 미화, 그리고 사실 왜곡에서 벗어나지 못 했더군. 자네에게  몇 가지만 상기시켜 주겠네.

벨라루스 작전은 스타프카가 신중하게 수립한 전략 계획에 따라 네 개의 전선에서 수행되었어.

알다시피 내가 제1, 제2벨라루스전선군의 작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조율했기 때문에 모든 세부 사항을 잘 알고 기억하고 있네.

이제 자네는  "두 개의 주 타격"이라는 아이디어를 옹호하면서 스타프카를 비판하고 있네.

우선, 전선이 실시하는 두 타격은 둘 다 주 타격이 될 수는 없네 (기껏해야 강력한 타격이라고 할 수 있음). 이건 전략의 기본이야. 하지만 이것이 문제의 핵심은 아닐세.

고의든 아니든, 자네는 자신을 앞으로 내세우면서, 지휘관들을 스타프카로 소집하기 전에 막대한 임무를 수행한 스타프카와  총참모부 대다수의 역할을 모욕했네.

벨라루스 작전에 대한 자네의 신문 인터뷰에서, 자네는 스탈린의 집무실에서 쫓겨났었다고 주장하면서 스타프카에서 자네가 겪은 사건에 대해 썼네.

자네가 틀렸네. 그건 1944년 11월, 자네와 내가 스탈린에게 바르샤바와 Modlin 사이에서 제47군의 무의미한 작전을 중단하고 전선 전체가 방어에 나서야 할 필요성에 대해 보고했을 때였네. 무슨 까닭인지 자네는 이 사실을 벨라루스 작전과 연결시켰어.

어쩌다 우연히 그런 건가?

나는 자네의 펜에서 나온 그 밖의 잘못된 사실들을 상기시키고 싶지는 않네.

지난 번 인터뷰 말미에 자네가 한 말에 충실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네: "나는 진실, 우리가 경험한 대조국전쟁의 진실을 쓰고 싶다."

안부를 전하며, G.K. 주코프

요약하면:

제1벨라루스전선군이 5월 12일부터 5월 24일 사이에 수립한 계획은 스타프카가 제안한 것과는 달랐으며, 하나가 아닌 두 개의 주요 타격을 가하는 것이었습니다.

해당 전선군의 계획은 26일 밤에 논의되었습니다. 이 회의 후 해당 전선군의 제안이 승인되었고, 해당 전선군은 원하는 병력을 지원받았습니다. 31일, 스타프카의 바그라티온 작전에 대한 지령은 새로운 작전 계획을 완전히 승인했습니다.

로코솝스키는 스탈린, 총참모부와 자신의 의견이 달랐다고 주장했는데, 그의 군사위원회와 고위 지휘관들은 이 이야기를 믿을만하다고 여겼고 자신들의 회고록에서 반복했습니다. 주코프와 바실렙스키는 그러한 의견 불일치가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반면, 바그라먄의 회고록에서는 로코솝스키가 참신한 제안을 했다고 언급하지만 의견 불일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특히 주코프는 로코솝스키의 이야기에 크게 기분이 상했고 제1벨라루스전선군에서 사용한 계획을 총참모부가 내놓았다고 주장했는데, 증거에 따르면 이는 잘못된 주장이었습니다. 또한 주코프에 대해 칭찬밖에 하지 않는 다른 관계자들도 회고록에서 주코프가 로코솝스키의 계획에 대해 회의적이었다고 언급합니다.

궁극적으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신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사예프가 문서를 읽는 데 오류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 로코솝스키의 이야기는 지탱됩니다. 5월 26일 밤 스탈린의 집무실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주관적인 정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하지만 주코프가 이 이야기에 대해 당혹스러워했고, 승인된 후에도 로코솝스키의 계획을 싫어했다고 알려진 것을 보면 별다른 소란 없이 모두가 계획에 동의했다는 바그라먄의 버전보다는 로코솝스키의 이야기가 더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추가적인 증거가 나올 때까지는 이사예프와 주코프가 틀렸을 가능성이 높고 로코솝스키가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출처:

(33) Sinitsyn, 161.

(34) Rokossovsky, 290.

(35) Георгий Жуков. Стенограмма октябрьского (1957 г.) пленума ЦК КПСС и другие документы, page 277.